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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의 하나님 이해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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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지금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연구 논문은 다석 류영모의 하나님 이해이다. 류영모는 체험하고 연구한 자신만의 철학과 사상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 그가 이해한 하나님을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없이 계신 하나님』이다. 『없이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우리들의 “있음”에 너무 치우쳐 하나님을 우리의 의식과 사상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많았다. 그러나 류영모는 “없음”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려 했고,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였으며,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하나님을 『없이 계신 하나님』으로 정의 내릴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상황을 직접 체험한 체험과, 자신이 공부하고 연구했던 많은 동양 경전들과 성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체험과 경전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정통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진 안았지만 상당히 신학적인 주제를 나름대로 풀고 있으며, 정통신학에서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많은 부분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류영모의 『없이 계신 하나님』을 주제로 잡고 신학적인 접근을 하고자 한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한국에는 다종교의 문화와 사상이 성장 발전되어 왔다. 그 속에서 기독교는 100여년 전에 이 땅에 건너와서 우리나라 한국민의 심성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장을 했다. 그러나 지금 그 성장의 결과는 무엇인가? 기독교 교회의 성장이 성숙한 기독교인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성장한 기독교 교회가 사회의 변화에 참여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했는가?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한국의 신학은 어떠한가? 각 시대마다 위대한 서구 신학과 교회가 수행한 책임적 응답과, 매 시대를 위한 복음의 신학적 해석이 있었듯이 한국의 신학은 불가능한가? 또한 한국의 기독교는 그 동안 한국의 다종교 문화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세계의 흐름에 나타나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이와 같은 신앙과 신학의 고민과 문제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국에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4의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기독교인들은 자부하고 자랑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적인 성장은 분명 한국 교회와 사회 속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성장이 현대의 인터넷 세계와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며 전도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틸리히는 “신학은 두개의 극, 즉 그것의 기초가 되는 영원한 진리와 이 영원한 진리가 받아 들여져야만 하는 시대적 상황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신학적 체계는 이 두 가지 요구를 완벽히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신학은 진리 요소를 희생시키던가, 아니면 그 상황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던가”라고 하면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의 체계적인 해석이다”라고 말하며 진리와 상황 사이에 체계적인 신학적 해석을 내리고 있다. 신학이란 틸리히의 말처럼 그 시대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며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해석하여 알아내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본다. 이러한 신학적 기초 위에서 우리는 교회에서 선포와 교육 그리고 선교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 교육적 측면에서 윤응진은 그의 책 “비판적 기독교 교육”을 통해 기독교 교육은 그 동안 기독교의 종교체제를 유지, 확장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보았으며, 신앙의 ‘탈 미국화’를 통해 미국의 종교적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서적 신앙을 수용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을 우리는 한국의 독특한 민중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기독교인은 민중신학 하면 단지 1970년대 군부정치 시대의 저항신학으로만 생각하고 그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는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진정 그러한가? 1970년대 안병무와 많은 민중 신학자들과 민중교회의 노력이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민중 신학의 사상은 아직 우리 곁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상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민중신학의 뿌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석 류영모는 민중을 씨이라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농부에 비유해 농부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의 글 “씨의 소리 듣잡고뎌”라는 글 속에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류영모는 자신의 삶을 농부의 삶과 같이 살았다. 그는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일언(一言)과 일좌(一座)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삶을 YMCA 연경반에서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그의 사상과 실천에 감동 받아 그의 삶을 따라 살아갔던 제자 함석헌을 통해 류영모의 씨 사상은 꽃이 피었다. 류영모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던 시대의 인물로 기독교를 그만의 동양적 특히 유(儒)・불(佛)・도(道)의 종교적 이해 가운데서 받아들였고, 당시에 세계와 한국에서의 현실 상황을 자신의 사상에 적용하여 기독교적으로도 풀었던 사람이다. 현재 다종교문화와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우리에게 류영모의 사상은 진정 다원적이다. 그에게 종교는 오직 하나님 중심의 종교였다. 현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 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류영모는 동양종교들과 기독교의 대화문제를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했다. 또한 우리가 위에서 문제로 제시한 많은 것들에 류영모는 자신만의 언어와 사상으로 답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와 사회와 사상의 굶주림에 서구의 신학은 배불려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신학 하는 신학도로서 한국의 새로운 신학의 정립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다석 류영모의 하나님 이해’를 연구해 보고자한다. 2. 연구범위와 전개방법 위의 연구목적에서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연구하고자 하는 나의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보니 류영모가 남기신 글들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에 산처럼 넘어야할 문제는 류영모가 써놓은 글을 읽기란 한국 어린아이가 옛날에나 쓰였던 라틴어를 읽는 것과 같다. 그렇다 보니 류영모의 글을 바로 접하여 공부한다면 소경이 코끼리 만지기 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류영모의 제자들이 그의 글을 해석 정리하여 최근에 많은 류영모의 글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1차 자료를 통한 연구는 아닐지라도 2차 자료의 단계에서 이루어진 글들을 활용하여 연구하였다. 그리고 류영모의 사상이 동양종교(유(儒)・불(佛)・도(道)) 사상과 많은 관련이 되어 있어 각 종교의 경전과 관련된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그 자료들은 개론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 정도이다. 또한 기독교 신학의 논문인한 기독교 신학이 없으면 단지 종교학에서 나오는 논문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 정통신학 학자들의 이론을 류영모의 사상과 대조시켜 살펴보았다. 연구의 범위는 다양한 신학적 범위가 있지만 신론(神論), 즉 하나님 이해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류영모의 글과 사상적 범위 역시 하나님 이해 부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연구의 전개 방법은 첫째, 다석 류영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그리고 그의 글과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생애를 안다면 그의 사상적 배경과 그의 글을 읽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류영모의 생애부분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다섯단계로 나눈 것은 그의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시기를 나 자신이 임의적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둘째, 류영모의 하나님 이해를 연구함에 있어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유(儒)・불(佛)・도(道)의 종교적 사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종교 사상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각 종교의 개론적인 사상과 류영모의 종교적 사상을 대비시킬 것이다. 셋째, 정통신학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에 대한 연구결과와 류영모가 이해한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를 대조하여 살펴볼 것이며, 여기에 류영모가 이해한 『없이 계신 하나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류영모가 이해한 하나님 이해를 가지고 기독교 신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나의 고민으로 결론을 내릴것이다. 내 논문에서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의 문제이다. 류영모는 ‘하나님’을 ‘하나님’, ‘하느님’, ‘한님’, ‘한아님’, ‘한나님’, ‘한웋님’ 등으로 표기하였다. 이렇게 다양하게 하나님에 대한 표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사용할 것인가가 나의 고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하나님’으로 통일해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인용문 중간 중간에 ‘한아님’이나 ‘아님’이란 표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용문으로서 그대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제 2 장 다석 류영모의 생애
스스로 비주류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던 다석 류영모 선생은 평생을 자신이 세워 놓은 사상과 뜻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앙과 사상은 그의 삶과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아마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살아온 그림자는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로 대별된다. 1 류영모의 어린 시절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 서울 남대문 수각교(水閣橋) 근처에서 아버지 류명근(柳明根)과 어머니 김완전(金完全)사이에서 태어났다. 류영모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眞我)가 아닙니다. 얼(靈)이 나입니다. 몸의 나는 흙덩어리요 재(灰) 한줌입니다. 그러나 얼 사람은 한없이 강하고 한없이 큽니다. 놓아두면 우주에 꽉 차고 움켜잡으면 가슴 세치(三寸)에 들어서는 이것이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류영모는 자신의 출생까지도 신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류영모는 태어나면서부터 기괴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그의 형제가 10명 이었으나 모두 죽고 형제는 영모와 영묵 단 둘 뿐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류영모는 “내 형제는 한 10여명 있었는데 둘 남고 다 죽었어요.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복된지 지금 살아 있는 이 내가 복된지 누가 알겠어요.”라며 죽은 형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류영모는 아버지 류명근으로부터 5살 때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다. 그는 천자문을 거꾸로 외울 만큼 천재적인 암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6살 때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통감(痛鑑)을 배웠다. 그러나 서당에서의 매맞는 일이 싫어서 서당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10살 때인 1900년 관립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그는 서당에서 배우지 못했던 산수를 배웠고 산수(算數)에 큰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수(數)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자주 말했으며, 수(數)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 표현이 28세 되던 1918년 1월 13일부터 자신의 산 날수를 셈하기 시작했으며, 총 33,200일을 살았다. 12살 때 소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소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에 박영호는 선생이 12살의 나이에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는 소학교에 대한 항일(抗日)의식의 표현이라고 평한다. 서당에서 류영모는 김인수라는 서당 선생으로부터 맹자(孟子)를 3년동안 공부했다. 이때가 처음 종교의 경전을 대한 때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맹자(孟子)를 경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후에는 유교의 경전으로 맹자를 대하게 되었으며, 또한 어린 시절 배웠던 맹자(孟子)에서 발췌한 맹자초(孟子抄)를 YMCA에서 가르쳤다. 그의 맹자에 대한 영향은 『다석일지』에 적어 놓고 있다. 류영모는 어린 시절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맹자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었다. 이런 유교의 영향은 후에 자신의 사상을 펼칠 때 선행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2 기독교 신앙과 신학문을 받아들인 청년시절 류영모는 15살 때 서당을 그만두고 경성학당(관립한성일어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동생 영묵과 YMCA에 드나들게 되었다. 이곳에서 신학문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YMCA에서 류영모는 당시 총무로 있던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인도로 예수를 믿어 연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15살 나는 봄에 그때 연동교회와 기독청년회에서 일 보시던 김정식 선생의 권유에 따라 죽은 아우 영묵과 함께 놀기 삼아 간 것이 시작이었어요”라고 당시의 상황을 말하였다. 1907년 류영모는 경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신학문의 관심이 계속 되었다. 경신학교에서 류영모는 과학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수를 좋아했던 영향이 큰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 오산학교에 과학 선생으로 초빙된 것과, 동경물리학교에 유학 가는 계기도 여기에 있다. 연동교회에 나가던 류영모는 1908년 연동교회 내에서 양반과 천민간의 분열과 다툼이 계속되는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만 알뿐 실천이 없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실망하고 1910년 정주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할 때 교회를 떠났다. 1910년 10월 오산학교에 부임한 류영모는 물리, 화학, 천문, 수학 등을 가르쳤으며, 먼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을 가르쳤다. 이런 영향으로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경공부와 예배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오산학교 교장이던 남강 이승훈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남강은 산정현(山亭峴) 교회의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오산학교도 공식적으로 기독교 정신으로 꾸려갔다. 3 믿음의 전기(轉機): 정통신앙을 떠나 비정통 신앙으로 오산학교에서 류영모는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으며, 정통신앙을 떠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를 만나게 된 것은 같은 오산학교 선생이었던 이광수가 일본 유학당시 톨스토이 전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톨스토이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기성교회를 비판하여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하였는데 톨스토이의 비판은 단지 외적인 교회의 제도뿐 아닌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에 대해서 교회가 독단적으로 신조만을 강조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영향을 받은 류영모는 22살에 비정통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류영모는 “나도 15살 입교하고 22살까지 십자가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이었어요. 톨스토이나 나는 비정통이에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회신앙을 떠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동생 영묵의 죽음이었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21세때 19세의 동생이 죽었어요. 동생이 죽었을 때 딱 낙심을 했어요. 그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 완성된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중략)…어째든 이 세상은 상대계니까 일이 자꾸 되어 가는 것이에요. 언제 일이 끝나나 하는 것은 안돼요.”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통해서 류영모는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로 끝났다는 것을 부정했고,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류영모는 노자와 불경 등을 읽기 시작했다. 동생의 죽음은 신앙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즉 불경이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속에도 진리가 있으므로 구약성경처럼 대접해야 한다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류영모는 22살 일본 동경물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산학교를 그만두었다. 일본에서도 그의 신앙적 아버지인 김정식을 동경 YMCA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류영모는 우찌무라간조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류영모는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인해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던 우찌무라간조와는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았다. 우찌무라간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內村이라는 이는 일본 종교사상가로 외국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본래의 전통을 세웠어요. 나나 톨스토이는 비 정통이에요.”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유학 생황도 접고 귀국하여 세상의 출세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 되기 위해 금욕주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4 류영모의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의 신앙체험 류영모는 동생 영묵의 죽음을 계기로 정통신앙에서 비정통신앙으로 옮겼으며, 호암 문일평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비정통의 신앙에서 더욱 진보된 신앙으로 변화되었다. 죽음에 대한 간접적 경험이 그의 걸어오던 신앙의 길을 바꾸어 놓아다. 그는 1939년 문일평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나서 “성서조선”에 그의 글을 올리는 3년 동안의 시기가 그의 마음 돌림의 시기이며 새로운 신앙적 체험과 확신을 얻게 되는 시기가 되었다. 성서 조선에 “문일평 형이 먼저 가시는데”, “결정함이 있으리”,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 “뉘게로 가오리까”라는 그의 신앙적 체험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란 글 속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 주여 오늘날도 그런자 하나이 있습니다. 주께서 저를 38년전 1905년 봄에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래(爾來) 병든 믿음으로 온것이 아닙니까 저는 아버지집에를 혼자 힘으로 드러가려고 하는 가운데 많은 세월을 거저 보낸것 같습니다.” 그리고 1942년 1월4일을 가지신의 중생일로 말하면서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금년 1월4일 (제18925일)새벽에 안해가 치통(齒痛)으로 고(苦)로와 하는 자리 옆에서 빌었읍니다. 낫기를 기도 하였습니다. 기도중에 전허공계(全虛空界)가 마무중(魔霧中)인것을 알고, 저 마무(魔霧)를 페치는 데는 성신 없이는 불가능인 것을 믿었읍니다. 게으름과 족한 줄 모름에서 몸은 사람의 짐이 되고 육(肉)이 병(病)의 보금자리가 된 것을 보옵고 게으름을 제치고 모든 미련(未練)을 떼고, 앞만(뒤는 죽은 것이다)향해 내처서 가야 살 것을 보았습니다. 죽을 것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음에 끊칠 것이오, 뒤 켠 죽을 것을 거두어서 앞의 삶에 양식(糧食)으로 이바지를 하므로만 몸이면 성한 몸, 새 생명을 여는 몸이 될 것을 보았습니다. 제칠 것은 제치고, 떼칠 것은 떼치고, 내칠 대로 내처 가는 이기는 목숨 앞에는 병도 감히 침범(侵犯)치 못할 것이오, 침범된 것도 퇴각격멸(退却擊滅) 할 것으로 믿어 졌습니다.” 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요한복음 5장 1-10절에 나타나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병 고침을 받는 이야기처럼 류영모는 예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말로 이야기하면 파사일진(破私一進)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의 파사일진의 기쁨에 대한 글을 올렸다. 믿음에 드러간이의 노래 나는 실음 없고나, 인제붙언 실음 없다. 님이 나를 차지(占領)하사, 님이 나를 맡으(保管)셨네. 님이 나를 갖이(所有)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 버렸다. ⌈죽기전에 뭘 할가?⌋도, ⌈남의 말은 어찔가?⌋도, 다 없어진 셈이다.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宇宙)가 나타나고, 모든 행동(行動), 선(線)을 그니, 만유물질(萬有物質)-느러섯다. 온세상을 뒤저 봐도, 거죽에는 나 없으니. 위이무(位而無)인 탈사아(脫私我)되어 반작! 빛. 요한 1장4절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슴 體(本)한 빛이로다. 님 뵈옵잔 낯이오,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오, 뜻을 받들 몸이라. 아멘 위의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류영모는 마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쳤다. 류영모의 기쁨은 나의 생명의 참 임자 되시고 뿌리 되시는 아버지(하나님)를 찾고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고 보니 언니(예수)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가장 으뜸 가는 효자인 예수를 거울(스승)삼아 살고자 하였다. 류영모는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는 글 속에서 “노자신(老子身)도 아니고 석가심(釋迦心)도 아니고 공자가(孔子家)도 아니고 인자(人子)예수라”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류영모의 체험은 틸리히가 이야기하는 “적극적 측면”의 신비의 계시체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신비체험의 “적극적 측면”은 “존재자체”(Being-itself)를 “존재의 힘”으로서 모든 힘과 창조성의 원천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근거”와 “힘”, “능력”(power)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서는 신비자는 객관적 대상으로서 인간의 종교적 탐구를 기다리는 수동적 실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능동적이며 “궁극적 관심”을 인간으로 하여금 갖게 하는 주체적 신비이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의 탐구대상이 되는 존재자들(beings)의 본질 현현을 계시하고 말할 수 있다. 5. 금욕적 생활의 실천기 류영모는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1921년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시절 류영모는 성경과 톨스토이 그리고 노자와 도덕경, 우찌무라간조까지 여러 사상을 거침없이 가르쳤다. 이때도 역시 편안한 방석보다는 널빤지를 사용하여 꿇어앉아 모든 일을 처리했고, 추운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였다. 그 이후 류영모는 1928년 서울 YMCA 간사 창주(創柱)) 현동완(玄東完)의 요청으로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노자(老子), 장자(壯子), 맹자(孟子) 등 옛 성현들의 말씀과 톨스토이, 간디 등의 사상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있어서 꼭 자신만의 독특한 자세로 꿇어앉아(一座) 그만의 독특한 우리말로 풀어서 가르치는 것(일언, 一言)을 잊지 않았다. 또한 류영모는 농사 짓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산 비봉 아래에 자리를 잡고 여러 과실수와 짐승들을 길렀다. 류영모는 “사람이 땅의 농사를 힘써 짓는 것은 결국 맘의 농사를 짓기 위함인데 맘의 농사란 진리를 깨달아 참(하나님)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금욕적 실천을 위해서 단식과 단색을 시작한 것이 1941년 2월 17일 이다. 류영모는 이때부터 하루에 저녁 한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의 삶을 살았고, 부인과는 오누이 지간으로 살기 위한 해혼(解昏)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자신의 농사에 대한 철학적 성향과 간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금욕적 생활을 계속하면서 류영모는 하루를 한 삶으로 생각하여 저녁에 잠드는 것을 죽는 것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생의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여겨 열심히 살았다. 이런 삶을 살다가 김교신의 죽음 앞에서 김교신과의 나이차이(11살)만큼만 더 살 것이라 추측하여 사망 예정일(1956년 4월 26일)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은 지나갔다. 그것을 류영모는 “1956년 4월 26일은 내가 죽기를 원한 날인데 오늘이 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내 장례를 내가 치루고 소상(小祥)을 내가 치루는 날입니다. 내 대상(大祥)을 내가 치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는 한아님을 믿고 한아님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단순해집니다 한아를 알고 살면 다른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한아(天) 아흡(知) 그것으로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이 아닌 죽음을 맞는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류영모는 노령의 나이에 두 번이나 톨스토이가 집을 떠나 객사한 것처럼 집을 나갔지만 두 번다 집으로 업혀 들어왔다. 톨스토이처럼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신을 가슴에 묻고 결국 1981년 2월 3일 91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류영모의 금욕적 실천에 대해서 그의 제자 김흥호는 다음과 이야기하고 있다. 일일일식에 대해서는 “류 선생은 일식이 성만찬이요 일식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제사요 산 예배라고 한다. 그는 성만찬으로만 살았다는 성녀 젬마를 좋아하여 젬마 전지를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흥호는 류영모의 금욕적 사상을 기독교적 사상과 접목하여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그는 십자가를 일식(一食)으로, 부활을 일언(一言)으로, 승천을 일좌(一座)로, 재림을 일인(一仁)으로 생각했다.”
제3장 류영모의 유(儒)・불(佛)・도(道) 관점에서 본 하나님 이해
류영모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 사상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인류가 입을 열어 말할 때부터 있었던 첫 말이다. 이것은 나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절대자에 대한 호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 부처와 노자, 공자의 아버지 역시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 대해서 말했던 사람들이다 라고 류영모는 말한다. 1. 유교적 기반 위에 세운 하나님 이해 1) 유교의 천(天)으로 이해한 하나님 유교에서는 신을 공공연히 인정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를 꺼리는 것으로 보아 유대 전통이나 기독교 복음과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요한 활동자 이며 기독교 신학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반면에 유교의 경전과 그 주해서에서는 가끔 언급되기만 할 뿐이다. 유교의 경전에서 신 개념을 사용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용어로 천(天)과 상제(上帝)라는 말이다. 처음 중국에서 천 사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요순(堯舜)시대로 유목 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전환 속에서 주위의 자연현상에 관하여 예민한 관찰을 하게 되어 명산(名山), 대천(大川), 풍우(風雨), 뢰전(雷電) 등 자연 현상 및 자연물들을 신(神)으로 보고 최고의 신(神)을 천(天)이라고 믿게 된 듯하다. 그들이 인식한 천은 끝없이 푸르고 푸른 창공이었으나 그 창공의 배후에는 우주 만상을 지배하는 천제(天帝)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후 하은주(夏殷周) 시대를 거치면서 주(周)나라 때에 나온 주역(周易) 속에 역(易)의 건위천괘(乾爲天卦)는 64괘 가운데 제일 첫머리에 있어 가장 으뜸 되는 괘라고 한다. 전(傳)에 “건(乾)은 천(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천(天)은 천(天)의 형체를 말하고 건(乾)은 천(天)의 성정(性情)을 말한다. 건(乾)은 건(健)이라는 뜻으로서 건전하고 쉼없는 상태를 말한다. 천(天)은 도(道)이다. 도(道)는 천차불위(天且不違)라는 뜻을 말한 것이고 나눠 말하면 형체를 천(天), 주재를 제(帝), 공용을 귀신(鬼神), 묘용을 신(神), 성정을 건(健)이라 한다. 건(乾)은 만물의 시초이므로 천(天)이 되고 양(陽)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임금이 된다.” 이렇듯 공자(孔子) 이전의 시대에 쓰여진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 속에서 유교에서 신 개념을 지칭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용어인 천(天)과 상제(上帝)의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서경 속에서는 만물을 다스리고 심판하는 인격적인 최고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는 ‘상제’란 말이 30번 이상 나오며, ‘천(天)’이란 단어는 270번 가량 나온다. 여기서 ‘천(天)’에 대한 의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첫째는 자연적 하늘과 땅으로 표현되는 의미에서 하늘로 이해되기도 하며, 둘째는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천신(天神)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상제’란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공자(孔子) 이전의 시대에서는 천을 상제와 같이 사용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상호 보충하는 관계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서는 나이 쉰을 천과 천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라고 했다. 여기에 “천명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천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 본성의 작용이고, 둘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이며 셋은 천의 지배 아래 있는 궁달(窮達), 운명이라는 것인데, 공자는 하나를 인(仁)으로 설명하고 둘을 선왕의 예악의 가르침으로 천하를 평화롭게 하려는 것으로 수행하고, 셋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는 말처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심경에 도달하였다고 이해한다.” 이상의 천(天)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면서 천(天) 사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은 천(天)이란 하늘이 인격적인 신의 개념에서 비인격적인 신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천(天)은 유대 민족의 여호와의 신처럼 만물을 창조하는 신은 아니었지만, 만물을 낳고 보호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인격적인 신이었다. 그런데 후에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천(天)의 신적인 활동 기회가 적어지고 활발하게 되지 않게 됨과 동시에, 인격적인 요소가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이 경향은 공자(孔子)가 나타난 기원전 6~5세기 사이의 시대에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다.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보면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 사시(四時)가 운행되며 만물이 생겨난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라는 말이 보인다. 천(天)은 사람처럼 말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시(四時)가 순환하고 만물이 생육(生育)한다. 그 속에 바로 천(天)이 있다는 말이다. 맹자에게 있어서도 범신론(汎神論)적 세계관 위에 서서 하늘(天)을 비인격화함과 동시에 만물 속에 내재하게 되고 인간 속에도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유교의 이러한 천(天)으로서의 신 개념이 류영모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읽고 배움을 가졌던 것이 위와 같은 유교의 경전들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들 속에서 얻은 그의 지혜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와 맞물려 그의 글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류영모는 하늘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은 글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하늘을 가질 때 자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늘이 나이기 때문이다. 한아님이 참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세상에는 하늘이 소용이 없다. 팔 수 있으면 팔겠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아들인 그이(君子)는 하늘을 자강(自强)하는데 쓴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류영모는 하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그이(君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석가, 공자, 노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인류의 근원을 하늘에 두고 있음을 류영모는 말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곧이 곧장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온 탓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모든 초목이 태양에서 왔기 때문에 언제나 태양이 그리워서 태양을 머리에 이고 태양을 찾아 하늘 높이 곧이 곧장 뻗어가며 높이높이 서 있는 것처럼, 사람은 한아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언제나 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또한 류영모는 유교의 변천에 대하여 “유학(儒學)하는 사람도 분명한 점은 늘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증자(曾子)시대까지만 하여도 천(天)이라는 말로 하느님을 찾았다. 하늘에 존재를 말하는 것은 이치(理致)・천리(天理)・진리(眞理)를 찾는 것이라는 유리론(唯理論)으로 이치시대가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유교에서도 하느님을 찾은 삶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이 썼던 책들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것과 세상의 살아가는 인간에게 교훈 하고자 했던 것들이 기독교의 성서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류영모는 인정하고 유교의 경전과 성서 그 외의 노자와 장자 역시 항상 그의 삶 속에 같이했던 책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성서를 묵상하였고 매일같이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다. 2) 성(性)으로 이해한 하나님 유교의 여러 경전 가운데 『중용(中庸)』은 으뜸가는 형이상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중용』가운데 구경(究竟)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와 ‘성자천지도야(誠者天之道也)’,‘성지자인지도야(誠之者人之道也)’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하나님의 얼(프뉴마)이시니’(요4:24)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얼을 좇는다는 뜻의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와 참에 나아간다는 뜻의 ‘성지자인지도야(誠之者天之道也)’를 합치면 예수가 말한 얼과 참으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이다. 중용의 천명지위성에서 성(性)을 어로 말하듯이 맹자(孟子)가 이야기한 성(性), 즉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늘이 천성(天性)이고 인간의 성(性)은 하늘 그 자체이며, 선(善)일 수밖에 없다”는 성선설에 입각한 맹자의 성을 얼로 이해하고 있다. 류영모는 성(性)을 다른 말로 하면 바탈이라고 하였다. 그의 글 “바탈”에서 성(性)을 바탈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탈 性通功完 바탈을 트고 마틈을 마츰이. 이다. 성통공완은 “삼일신고” 진리훈에 나오는 말이다. 바탈을 꿰뚫고 자기 사명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바탈을 본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자기를 알고, 맡음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명을 얻어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제자를 얻어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진리를 깨달은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인이다. 류영모는 바탈은 얼로서 같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성(性)을 바탈, 얼로 사용하고 이해한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얼은 바로 하나님의 얼로서 이해한다. ‘얼’로서 이해한 하나님은 곧, 영(靈)으로서 이해하였다. 그리고 류영모는 하나님의 얼 을 생명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생명을 주는 영과 같은 의미의 얼로서의 하나님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어머니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에 대해서 몰트만은 다시 태어남 속에 있는 하나님 경험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다면, 성령은 하나님 자녀들의 어미니 이며, 따라서 이 어머니는 ‘여자 성령’(Geistin)이라 불리워 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성령의 여성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류영모는 얼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숨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류영모는 ‘숨과 얼 말과 글’이란 자신의 글에서 숨과 얼의 관계를 잘 사용하고 있다. 숨과 얼 말과 글 숨은 그립고 얼은 울린다. 글로 숨을 다 못 밝히겠고 말로 얼을 못 다 밝힌다. 맑으르 숨과 얼은 제 긔림이오, 절로 울림이어라. 생명의 숨과 진리의 얼, 생명의 말과 진리의 글. 생명의 말숨과 진리의 얼. 숨은, 생명의 숨은 그립다. 사람은 살고 싶어한다.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한다. 진리의 얼은, 진리의 성령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머리를 울리고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한다. 글로 숨은 못 밝힌다. 숨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 숨어 계시는 실재이기 때문에 그림이나 그림으로 대상화・객관화・현상화할 수가 없다. <후략> 또한 류영모는 “성령의 원말이 숨(氣)이라 한다. 영국에서 함경도에 처음 선교사로 왔던 패녹이란 분은 “성령”을 “숨님”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류영모 역시 숨, 혹은 숨님 이란 표현으로 영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 “우릴내샤 예 이제 살게하는 숨님요, 한뜻 다다름에 닐닌 돌려 푸러피인 숨숴”, “우리를 이 세상에 내셔서 여기서 이제 살게해 주시는 성신이신 숨님이여, 숨을 돌리고 고단을 풀고 꽃피를 피여내셔 목숨쉬는 숨님”. 생명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와 숨의 차원에서 알아본 얼(靈)로서의 하나님은 어디나 언제나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활동하신다. 미하엘 벨커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정의, 자비하심, 하느님의 영광과 충만의 완전한 증거를 위한 하느님의 영의 활동은 다원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은 한계가 없으시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숨으로서 다가오며 활동하심을 알 수 있다. 3) 부자유친의 관계로 이해한 예수와 하나님 류영모의 유교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 이해의 극치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효(孝)의 개념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관계로 이해한 것이다. 유교의 효(孝) 사상은 다른 세계적인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공자는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경전의 근본정신이 인(仁)에 있음을 말하였고, 또한 인의 근본이 효(孝)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효경을 풀었다. 인(仁)의 근본에 효(孝)를 두고 있음은 논어 “학이편(學而編)”에 나타난다. “군자는 근본이 되는 일에 힘써야하며, 모든 일에 근본이 서야만 도가 생겨난다. 효성과 우애는 바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인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말하고 있다. 류영모는 효에 대한 그의 사상을 종교적인 부분으로 옮겨 예수 이해를 효자로서, 부자유친적 예수 이해로 발전시켰다. 류영모의 제자 김흥호는 이렇게 말한다. “유교의 핵심은 효(孝) 사상이고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유교의 전부이다.” 그는 기독교를 부자유친의 완성태라고 본다. 예수를 효자의 극치로 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서 신앙의 본질을 찾는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예수를 부자유친의 완성태인 효자로 보았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받들고 살아간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다는 대목을 효의 극치라고 보았다.
십자가(十字架) 가로 가던 누리는 가로대에 못박히고, 바로솟아 나갈 얼만 머리위로 솎우치니 영원(永遠)을 허(虛)전타 마라 길히길히 삶이다. 인자를 가로(橫) 보면 생전(生前), 제 욕심(慾心)만을 채움을 복(福)으로 아는 구인생관(舊人生觀)으로 보면, 미천(微賤)한 데서 나서, 삼십평생(三十平生)에 출세(出世)한 것이 없고 최종(最終) 삼년간, 범인지목(犯人指目)을 받다가, 포사(暴死)를 당한 것이 예수의 인간 생이었다. 누가 도라다나 보랴. 인자(人子)를 세로(縱) 보면 속안(俗眼)에는 보이지도 않고, 본 사람의 말도 믿지도 않겠지마는, 목수(木手)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설흔살에, 한울문(天國門) 세울 일을 맡았다면, 삼년(三年)동안 세상을 책망(責望)하는 채찍으로 묵은 누리를 다 헐어 냈다면, 묵은 누리의 돌 받침이 (안식일(安息日)을 중심으로 한 고식생활(姑息生活)뢰된 세계니, 무망(無望)의 인생은 고역(苦役)이라, 안식(安息)을 최대이상(最大理想)으로 할밖에 새로 세운 나무기둥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극복사명(克復使命)으로 된 세계니, 신망(信望)의 인생은 성역(聖役)이라. 영원진작(永遠振作)을 최상(最上) 이상(理想)으로 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류영모는 예수를 가로로 보면 아무 의미없이 죽어간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세로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코자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예수의 수직적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류영모는 예수를 자신을 책선 하는 분으로 자신의 의중지인(意中之人)으로 말하고 있다. “내게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없다. 예수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믿는다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신앙한 것이 아니다. “예수하고 우리하고 차원이 다른 게 아니다.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고 하였다고 예수가 우리보다 월등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잘 섬겼던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류영모의 말로 하면 부자유친을 잘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이(君子)인 것이다. 예수와 다른 성인들을 그이 즉 군자(君子)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유교의 군자상의 영향일 것이다. “군자(君子)를 나는 ‘그이’라고 한다. 군자는 임금의 아들이나 하늘의 아들이다. 그이라는 그는 저 그리운 하늘을 뜻한다. 하늘을 그리며 그 하늘을 이어받은 이가 그이다.” “사람은 하늘을 가질 때 자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늘이 나이기 때문이다. 한아님이 참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세상에는 하늘이 소용이 없다. 팔 수 있으면 팔겠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아들인 그이(君子)는 하늘을 자강(自强)하는데 쓴다.” 이와 같이 류영모는 그이(君子)를 하늘 즉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을 번영케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류영모는 그의 시(詩)속에서 예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人子 예수 말슴(道)으로 몸일우고 뜻을 받어 맘하시니 한울밖엔 집이 없고 거름거린 참과 옳음 뵈오니 한나신아들 예수신가 하노라 한나신아들(獨生子) 빋만가려던 世上은 못난아들들의 짓이오 솟아날 門이 열리며 한나신아들 오시니 시원타, 죽어산길에 그사랑을 피셨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몸과 맘을 다해 실천하고 사는 사람을 독생자라 하였다. 그 독생자는 예수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석가와 공자와 노자 같은 인물들 역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살았던 독생자로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 뜻을 가장 올곧게 실천한 사람이 바로 예수인 것이다. 그런 예수를 참 스승으로 모시고 책선(責善)의 의중지인(意中之人)으로 살았던 사람이 바로 류영모 이다. 2. 불교의 공(空; 븬탕)으로 이해한 하나님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고 한국에서는 토착화된 불교로서 우리 민족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고려시대에는 숭불정책을 실행해 오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정책으로 이어지면서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신비적인 종교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과 같이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어 대중들이 경전을 통해서 불교의 사상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류영모가 불교의 경전을 접하게 된 것은 동생 영묵의 죽음으로 신앙의 전기를 맞았을 때이다. 이때는 불교뿐만이 아닌 도교의 경전과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다. 류영모는 “나는 20살 전후에 불경 노자를 읽었다. 그래서 무(無), 공(空)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류영모는 불교의 경전 중 반야심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반야심경을 자세히 알면 불교 일반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생명을 생각하는 이, 정신을 생각하는 이는 이 반야심경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쯤 갔다는 것은 큰 재물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또한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 대해서 류영모는 “不二면 卽無이다. 상대가 없으면 절대이다. 절대는 무이다. 상대적 유, 상대적 무도 아닌 것이 不二이다. 不二는 無二라 해도 좋다. 不二면 無二이다. 우리가 참으로 不二卽無하면 상대세계에서의 종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에서 멸(滅)이란 부정의 사상은 류영모에게 있어서 주요한 사상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영향을 준 사상이다. 멸(滅)의 사상은 여섯 군데(빛, 소리, 냄새, 맛, 맨치, 올)가 여섯 뿌리(눈, 귀, 코, 혀, 몸, 뜻)와 만나 여섯 알(봐(視), 듣(聽), 맡(嗅), 먹(食), 맨지(接), 봄(見))이 생기는 18계(界)의 일은 몽땅 거짓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공(空)과 무(無)의 사상을 좋아했다. 빈탕 혹은 허공의 공(空)과 무(無)는 절대 이다. 이 절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바로 븬탕, 허공은 절대 세계 즉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1) 불교 공(空)으로서의 하나님 불교의 기본 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