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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6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1
漫畵 같은 세월 속에 맞은 두 번째 해직 벌써 4반세기가 흘러간 옛 일이지만 1980년 8월 27일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아무리 생각을 고쳐해도 그것은 만화요 골계이다. 나는 지금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손을 비비며 하나님이 내신 위대한 정치 지도자라고 참 꼴불견인 추태를 부린 기독계의 저명한 목사님 몇몇분을 연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 18년 독재가 낳은 사생아”였다. 그 위대하셨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지금도 만화요 골계를 계속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광주항쟁이나 당시의 정계의 표정을 자세히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전정권이 만화라면 그런 웃지못할 만화를 성사시킨 당시의 3金도 만화요 골계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개인 차원에서 경험한 입맛이 씁쓸한 사건 하나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나는 노명식 교수와 이미 타계한 조요한 교수와 어느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새는 그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신문의 가판이 성행하고 있을 때였다. 노 선생이 때마침 신문을 사서 펼치더니 별안간 “김 선생 이것 어찌된 거야?”라며 신문을 내게 내밀었다. 보니 함석헌 선생님이 김대중 씨의 대통령 출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럴 리 없다 싶어 곧바로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선생님께서 직접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흥분된 어조로 “큰일 낼 사람들이오. 이 노릇이 다아 돈 노름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셋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전날에 선생님께 당시 선생님 주변의 한 명사의 부인이 성명서를 들고와서 지지 서명을 해주실 것을 말씀드렸다는 것이다. 그 성명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한다. 선생님도 읽으시고 그 별지에 서명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다음 날에 김대중 씨 지지성명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그때 전화로 하신 “돈노름”이라는 말씀의 내용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미주알고주알 선생님께 캐어 여쭐 상황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기독교방송에서 5분 컬럼을 맡고 있었다. 이 컬럼은 어느 요일을 택해서 약 5분 분량의 글을 낭독하는 순서였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다른 요일에 김동길 박사도 이 컬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든 나는 이 5분 컬럼에서 위의 일을 내용으로 담은 글을 써서 녹음을 했다. 함 선생님과 같은 원로 되시는 분을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라고 강하게 나무라는 글이었다. 대체로 실제로 방송으로 나가기 전 일주일정도 앞서 녹음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녹음한 다음날에 담당 PD가 나의 글의 일부분을 삭제해서 방송하겠으니 양해해달라고 전화했다. 나는 방송사의 사정에 의해서 나의 방송 프로그램 자체를 취소한다면 편집권의 문제니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내 이름으로 컬럼이 방송된다면 일부 삭제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뜻을 전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전화가 오갔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결국 PD의 말대로 일부가 삭제된 채 방송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컬럼을 중단하였다. 며칠 후 나의 방송된 컬럼이 그대로 당시의 야당 기관지에 게재되었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 기관지를 보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 발표된 성명이 134명 지식인 성명서이다. 이 성명서의 내용은 전두환을 옹호하는 신군부 세력은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태평로 성공회 본당 옆 쎄실다방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가졌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 나의 눈앞에 어리는 얼굴은 이미 고인이 된 서남동 목사님이시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로 나는 학교에 칩거해 있었다. 무대가 바뀌지 않았나? 이제는 무대 위에서 활약해야할 배우의 얼굴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더욱이나 나는 자연과학도 아닌가? 지나간 4년간의 공백 메우기도 벅찼다. 그래서 일체 두문불출 학교에만 처박혀 있었다. 차기 간사장으로서 대한화학회의 일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당시의 나의 심정은 실험유기화학자로의 복귀 일념이었다. 그런데 일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자연과학도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134명 지식인 성명서에 자연과학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자연히 거론된 사람이 나였다. 직접 누가 나에게 전달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처음 쎄실다방의 모임에 나가보니 이미 여러차례 모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할 소리를 하는데 그리고 자연과학분야의 인사를 대신해서 참석해 달라는데 거부할 이유도 그리고 명분도 없었다. 직접 간접으로 장회익 교수, 송상용 교수, 모혜정 교수, 남천우 교수 그리고 김숙희 교수 등의 자연과학분야의 교수님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특히 모처럼 성균관대학에 정착한 송상용 교수가 이로 인해 다시 그 직장을 읽게 된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자연과학계를 대표하는 134명 지식인 성명서 준비위원이 되고 말았다. 정보부, 보안사령부, 남영동, 서빙고 등등의 호칭으로 나의 주변 인물들이 연행되어가는 망이 점점 좁혀져 오는 것이 체감되었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아마도 미국 기독교 고등교육제단의 프로젝트 관계로 홍콩을 다녀온 것이 6월 중순이라고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출국이 가능했었던 것이다. 홍콩 충치대학 도서관에서 광주학살사건의 생생한 사진보도를 타임지 뉴스위크지를 통해 접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걸레가 되다시피 잘리고 먹칠되어 배부되던 외국잡지를 생각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떻든 당시 주간조선에 연재하고 있었던 하이젠버그의 ‘부분과 전체’의 원고를 가방에 넣고 내깐으로는 외박으로 피신하다가 옷 갈아입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렸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 동네 어귀 후미진데서 정보부 사람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 8월 중순경 아닌가 생각된다. 74년 초에
갔었던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다. 완전히 현대화 되었다고나 할까. 지하실은 방음장치가 철저히 되어있는 취조실로 호텔을 방불케 하였다. 24시간
대낮같이 비치는 백열등 밑에서 2-3일을 보냈다. 전번과 같이 무엇을 날조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떤 서류를 주면서 이것을 읽고
그것에 맞추어 자술서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읽어보니 변형윤 교수의 자술서였다. 그 자술서에 의하면 변 교수가 나를 지목하여 자연과학계 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오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새삼스럽게 따지고 말고가 없었다. 대체로 변 교수의 자술서에 맞추어서 자술서를
작성하였다. 결국 집에서 도장을 가져와서 백지와 백봉투에 사직서를 써서 내 손으로 도장을 찍고 고려대학교 이사장 앞으로 내 집 주소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백봉투를 봉인하는 것으로 나의 취조는 끝났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해직 경위다. 그래서 나는 다시 84년 7월까지 4년간 해직교수라는
명예직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생명을 드러내는 길이다. 국가는 전체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생각하는 인간이 그때 거기를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잡은 것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때 거기서 그 할 임무를 다한 담에는 사정없이 내버리기를 새 옷이 생겼을 때 낡은 옷을
벗듯이 하여야 한다. 그것이 나라 사랑하는 도리요 그 국가에 역사적 의미를 붙여주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을 못
가진 사람이 낡은 시대의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잘하노라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동안에 낡은 국가관 낡은 도덕을 강요해서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은
가엾은 일이다…나는 오늘(1980.2.29) 아침에 명상하는 가운데 특히 老子의 가르침에서 얻은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여기서 말해보려고
한다. 전두환 정권의 만화와 골계도 그리고 광주학살이라는 대사건도 그리고 그 후로 계속되는 이 나라의 혼란도 치허극, 수정독을 하지 못한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면 크게 잘못된 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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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5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2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천하의 씨알 여러분 더욱더 깨끗하시고 씩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 걸음은 언제나 씩씩한 것입니다(天行健). 그러므로 씨알(님의
아들-君子)은 스스로 굳세이 쉬지 않는(自彊不息) 법입니다. 전두환보안사령관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약 3개월 전인 1980년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國家保衛對策委)라는 것이 신설되고 11대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하기 약 한달 전인 7월 31일에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취소라는 조치가 내려진다. 172개의 정기간행물 안에 <씨알의
소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1980년도 7월호 <씨알의 소리>지에는 위의 선생님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은 실려 있지 않다. 그러니까 <씨알의 소리>지가 등록취소로 폐간된 직후에 우편으로 <씨알의 소리>지
독자들에게 부쳐진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라고 보아서 대과는 없을 것 같다. <씨알의 소리 애독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너무나 오래간만입니다. 어떻게 이 모진 역사의 풍랑을 이겨
오셨습니까? 위의 글은 그야말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글이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의 <복간호> (1988년 12월)에 실린 선생님의 마지막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병상에서 구술하신 것을 필사해서 실은 글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상 선생님께서 맘먹고 쓰신 마지막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는 1980년 7월호에 실려 있는 <治人事天莫若嗇>이라는 제목의 글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나의 역사적인 민족으로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아니될 참말은 뭐냐하는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하려면
욕심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내 나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적이라는 저 나라를 위해서도 싸웁니다. 의는 내나라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적이라는 저 나라를 위해서도 싸웁니다. 의는 내 나라에만 있는 것 아니고 저 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법에서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할 때의 화는 내나라 국민을 사랑한단 말만 아니고 저쪽 적국이라는 저쪽의 국민을 더욱더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욕심이란 무엇입니까? ‘나’, 나입니다. 모든 일에 나 하나가 들어가면 다 썩어버립니다. 국민이 썩으면 사치를 합니다.
옷을 지나치게 입고 먹기를 지나치게 하는 것만이 사치 아닙니다. 말에도 글에도 생각에도 권력에도 사치가 있습니다. 필요없이 하는 것은 다
사치입니다. 사치하는 마음은 남을 위하지 않고 나만을 아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한번 그런 마음이 들면 끝이 없습니다. 위의 선생님의 <씨알의 소리>를 통한 마지막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
주시는 선생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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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2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3
최후승리가 아니라 절대승리다 <씨알의 소리>지 1980년 1·2월호 합병호 98쪽에 「80년대를 여는 문턱에 서서 본지도 앞으로 새롭고 알찬 씨알의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본지 편집위원을 모셨습니다. <편집위원> 金成植(경희대 명예교수·文博) 安炳茂(한국신학연구소장·神博) 李兌榮(가정법률상담소장·法博) 金東吉(연세대교수·哲博) 宋建鎬(전동아일보편집국장) 金容駿(고려대학교수·理博) 桂勳梯(민주수호국민협의회운영위원) <발행인 및 주간> 咸錫憲 <편집장> 朴善均 월간 씨알의 소리사」라는 社告가 게재되어 있다. 그때까지 그 누구에 지라면 서러워할 만큼 함석헌의 인격에 흠뻑 빠져있던 나로서 새삼 <씨알의 소리>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한편 자연과학도로서 정식으로 편집위원이라는 자리에 끼워주신 함선생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 들였다. 한편 나의 평생에 또하나의 공식적인 명예로운 이력이 아닐 수 없다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본래 <씨알의 소리>지에는 특별히 편집위원이라는 것 없이 시작된 함선생님 개인 잡지라는 성격이 짙었다. 최근에 발표된 박선균님의 <70년대 「씨알의 소리」이야기>(<씨알의 소리>지 2004년 7·8월호 27쪽>이라는 제목의 글에 의하면 <씨알의 소리>지 편집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972년 2·3월 합병호가 나올 당시에 장준하 선생님이 함석헌 선생님과 상의하셔서 위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선균님은 <씨알의 소리>지 창간 때부터 편집에 관여한 말하자면 <씨알의 소리>지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회고담은 <씨알의 소리>지 편집에 숨어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어떻든 그때 위촉된 편집위원은 폐간된 <씨알의 소리>지를 13개월 동안 무료변론을 담당하여 승소하도록 도와주신 이병린 변호사, 고려대학교 김성식 교수,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선생, 가정볍률 상담소 소장 이태영 변호사, 연세대학교 김동길 박사, 한신대학교 안병무 박사, 민주수호국민회 운영위원 계훈제 선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3년 6월에 법정 스님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되고 훨씬 후에 송건호 선생과 내가 편집위원이 되었다고 소개되어있다. 그러고보면 처음 편집위원 중에서 돌아가신 장준하 선생과 천관우 선생 그리고 이병린 변호사와 법정 스님이 빠지고 송건호 선생과 내가 새로이 위촉된 셈이다. 내 기억으로는 김성식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 같은 서양사를 전공하신 노명식 교수가 김성식 선생님 후임격으로 편집위원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80년도 나의 수첩에 의하면 1980년 1월 28일 점심때 김동길 박사댁에서 <씨알의 소리>지의 편집회의를 했던 것으로 메모되어 있다. 1980년 7월호로 이미 지난 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등록취소가 되었으니 1988년 12월에 두 번 째로 복간될 때까지 7개월간 편집위원회를 가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무렵 함선생님은 상당한 기간 당국에 연행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귀가하신 후에 김동길 박사의 주선으로 함선생님을 모시고 수안보 온천에 가서 하룻 밤을 지내고 돌아온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1988년 12월 복간호에 <씨알의 소리 복간에 부친다>라는 글에서 나와 같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었던 송건호 당시 한겨례 신문사 발행인은 <그 무렵 나는 동아일보사를 물러난 후 독재정권의 감시 밑에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이므로 「씨알의 소리」편집위원이라는 직책은 나에게 있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좋은 기회가 되어 있었다. 거의 매일 같이 대문 앞을 기관원이 감시하고 필자가 외출하면 일일이 미행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하나 둘 다 떨어져 나가 거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극히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달에 한 번 당시의 연세대 김동길 교수 집(신촌)에 모여 점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씨알의 소리」에 모이는 편집위원들은 당시 박정권에 반대하는 가장 두드러진 지식인 처럼 주목을 받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미 고인이 된 송건호 선생이지만 새삼 이 글에서도 송건호 선생의 체취가 느껴져 감회가 깊어진다. 기왕에 송건호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가지 에피소드를 부연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인지 딱 기억이 나지 않지만 쌍문동 선생님 댁이라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80년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님 댁에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때마침 선생님께서 송건호 선생의 책을 읽으시다가 <송건호가 예수를 믿으면 참 좋갔다>라고 한마디 하시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송건호는 그야말로 쇳소리라도 날만큼 타협이 없는 칼칼한 대쪽같은 인품이었다. 선생님도 그의 책에서 무엇을 느끼셨는지 위와 같은 말씀을 혼잣 소리로 하셨던 것을 보면 선생님도 내가 송건호님에게서 느꼈던 같은 느낌을 가지셨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과 같이 예배를 드리게 되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이라 함은 그저 보통말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는 안그러겠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그렇게는 말 안하겠습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해야 하는 거, 말을 하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도 모르게 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보통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다 해야지요. 그렇지만 ‘참’산다는 것은 산다는 말도 안붙여도 좋아요. 참이란 것은 지금 여기 뿐이지 또 다른 시간이 있다던지 그런거 아닙니다. 나는 지금 그 자리에서 될수록은 그러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 다른 곳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 다른 하루가 있다는 것도 그것도 빈 생각이다. 그런 것이 다 건성으로 노는 소리지 ‘참’은 아니기 때문에 ‘참’을 해보려고 될수록은 다른 시간을 상상은 안해봤습니다. 다른 곳이라는 걸 생각도 안해봤습니다. 다른 또 뭣이라는 그런 생각이 일체 안났습니다. 이 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속에서는 그걸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참 싸움을 정말 싸우려면, 참참을 하려면 내가 이 시간에 말도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 모인 이것을, 몸을 가진 사람으로 예배를 지내야 하니까 내 속에 그런 어느 순간도 순간 뿐이지 그런 순간에 한 것이 그 다음에 무슨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순간에 할 뭣이 지금 할 것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순간에 할 뭣이 지금 할 것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 순간만을 살아 보려고, 이 순간에 주어지는 말을 하자고 노력을, 참 의미로 하면 그런 노력도 안해야 되요. 예수님 말씀하신 것 옳은 말씀 아니예요? “너희가 이제 있다가는 어디로 끌려갈런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소위 재판한다, 정치한다는 사람 앞에 가 설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대답을 어떻게 할까, 그건 걱정하지마라. 그 순간에 가면 말할 것을 주실거다” 왜?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속에 있는 그 분이 하시는 거니까 그 걱정하지 말라”그랬어요.> 위의 글은 1980년 8월 17일 내가 나가는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절터에 서 있는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하자면 주일 설교의 서두이다. 그날 이 교회 순서지를 보면 <최후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말씀하셨던 것으로 되어있다. 나는 그날 하신 선생님의 설교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 해서 읽었다. 얼마 후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어떻든 등록취소되기 약 7개월 전에 정식으로 편집위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이 잡지를 사실상 책임을 지게 되는 그 과정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면 이미 위에서 인용한 송건호 선생의 글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모든 국민이 절망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만화와 골계와 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야말로 만화와 같은 세상 돌아감을 직시하시면서 앞으로 10년도 넘기지 못할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신 듯 마치 유언과 같은 매우 심각한 말씀을 절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떨리는 마음이 앞서는 숙연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당신을 평소에 추종하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선생님에게는 낯선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그야말로 처음 뵙는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몇번 읽어 보세요, 가만히…>라는 말씀으로 끝나는 선생님의 이 설교야말로 십자가의 극형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끝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 성경말씀을 되풀이 읽고 <최후승리>가 아니라 <절대승리>로 본래부터 이긴 싸움을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라는 나에게 주시는 선생님의 유언으로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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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4
노끈의 역사에서 너와 내가 따로 있으랴
위의 함 선생님의 말씀은 1983년 3월 23일 대전 민중교회에서 드린 예배 설교를 발췌한 것이다. 이 발췌문에서 우리는 함 선생님의 역사관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형이상학을 볼 수 있다. 1백72개의 정기간행물을 등록 취소시키고 10대 국회의원을 포함한 8백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으며 재심을 청구한 5백69명 중에서 2백68명이 구제되었다. 결국 5백67명의 정치인들이 발을 묶인 셈이다. 그리고 1981년 1월 15일에는 전두환 대통령 자신을 총재로 하는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창당되었고 이틀 뒤에는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민한당) 그리고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다는 한국국민당(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당시 돌아다녔던 말대로 1대대 2충대 3소대가 이 나라의 정치를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위 장관하고 고만두면 5억원이라는 거금을 전별금으로 받았던 소위 전두환의 통 큰 돈정치가 전개되고 있었지만 함 선생님은 여전히 바쁘게 여기저기 초청강연회에 응하시면서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당신의 생각을 열심히 가르치시고 계셨다. 이미 한두 번 언급한 바 있지만 명동 카톨릭 여학생 회관에서 매주 한 번씩 있었던 선생님의 老子講解는 나로서는 가뭄에 만나는 단 비와 같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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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7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5
생명은 귀하다, 정신은 죽지 않는다 <물론 지금 세계의 지배권을 쥐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해서 자기네의 자리를 지키려는 낡은 정치와 싸우려면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세계를 이 정치에 하는 대로 맡겨 두어서 고등기술로 하는 전쟁을 마음대로 할 때에 있을 그것에 비하면
비례가 못될이만큼 적은 것입니다. 10억년 동안 느리고 느린 길을 걸어 이루 헬 수 없는 희생을 값으로 내며 겨우 해서 오늘날 이 정신이요
도덕이요 하는데까지 간신히 추어 올라온 이 생명이 달팽이를 생각 옅은 싸움꾼들의 장난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멸망에 빠지도록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만 희생을 못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이제 생명은 귀하다는 것 정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 정의의 법칙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은 몸으로 증거할 때가 왔습니다. 위의 함 선생님의 글을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체제하에서 1973년 ‘씨알의 소리’ 11월호에 발표된 것이지만 아마도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리고 인류 역사의 영원한 염원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만화요 골계이며 또한 으스스한 빙토의 사나운 서풍이 불어닥치는 전두환 정권도 강압의 총칼만 가지고 민중을 다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에 걸쳐 일본의 가미가제(神風)을 모방하여 소위 “국풍 81”이라는 웃지못할
천만명에 가까운 관람객을 동원하는 ‘제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1973년 12월 3일 석유파동으로 없어진
아침방송을 7년 6개월만인 81년 5월에 다시 선을 보였으며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 84차 IOC총회에서 88년도
세계 올림픽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한다는데 성공하였고 연이어 같은 해 11월 26일에 86 아시안게임 유치에도 성공을 거둠으로써 명실상부한 올림픽
공화국의 가치를 높였던 것이다.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의 군정포고 1호로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된지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그야말로 일반국민에게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해방감이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일반국민들에게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듯한 모든 표면상의 규제를 풀어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반항하는 학생들의
강제징집과 소위 녹화사업으로 알려진 특수요원 양성이라는 미명하에 강제징집 대상자는 1천여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일부는 소위 ‘역의식화’ 교육을
실시하고 이들을 다시 학원에 복귀시켜 소위 ‘프락치’ 임무를 맡기는 말하자면 인간성 파괴행위를 다반사로 자행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당시 소위
기관원들의 학원상주는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 8월 31일 밤에 대한항공 007편은 소련영공을 침범해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983년 10월 9일에는 소위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하여 전두환 대통령은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으나 전 대통령을 기다리던 참모들은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하여 1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는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이런 와중에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때 나는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비율빈에 머물고 있었다. 1984년 초에 귀국하고 보니 학원자율화 조치가 발표되고 있었으나 그 실현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경위를 여기서 상론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어떻든 당시 해직교수였던 내가 그래도 당시 고려대학교 김준엽총장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해직교수 중에서는 가장 빨리 복직한 것이 1984년 7월이었다. 고려대학교를 제외한 다른 대학의 해직교수들이 복직한 것은 2학기가 시작된 9월이거나 또는 1975년 3월까지 미루어지는 기현상들이 벌어졌었다. 이와 같은 경위에 대한 설명도 생략하기로 하겠다. 어떻든 1979년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전후로 복직하였던 1년여를 합쳐서 근 10년 가까운 나의 소위 해직교수 신세를 완전히 면하게 된 것은 나의 생애에서 또 한번의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1985년 10월 27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하신 선생님의 ‘새 사람 : 고쳐나지 않고는 종교개혁 절대 못한다’(‘씨알의 소리’지 통권 101호, 53~73쪽)라는 설교 말씀에 나타난 깊은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자.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 주일을 기념하는 예배의 설교였다. 공관복음과 달리 당신은 요한복음을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겉에 나타난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된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부터 제목을 붙이자면 ‘새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새사람’이 아니겠는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새사람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특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라는 요한복음 4장 1절의 말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대목이 특히 관심을 끌게 한다. 세례요한의 목을 벤 당시의 권력층이 세례요한보다 추종하는 무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여기서 이미 예수의 십자가는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사실을 아신 예수님이 정면충돌을 피하고 갈릴리로 내려가는 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당신이 죽임을 당한 후룰 대비하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갈릴리로 피하셨다는 것이다.> 당시의 무모한 저항운동을 경고하시는 함 선생님의 깊은 메시지를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분신자살이 유행하던 당시의 우리나라의 실정에 대한 함 선생님의 통곡은 이렇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시기를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함 선생님은 모든 해답을 찾고 있다. 한마디로 盡人事待天命이다. 죽음을 건 기다림이다. 당시의 전두환 정권 하의 민주화 운동권뿐만 아니라 오늘의 참여정권 및 숱하게 난립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그리고 이 나라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오늘의 지성인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깊은 함 선생님의 오늘의 메시지를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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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2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6
역사도 인생도 다 내속에 있다 <진화의 과정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과정이고 또 흘러 돌아가는 과정이다. 로고스는 만물의 근원이요 또 만물의 귀착점이다. 그는
창조자요 또 통합자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의미는 ‘사랑’에 있다. 만물을 낳은 것은 이 아가페이다. 그러나
지음을 받는 만물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땅에 있으면서도 땅에서 떠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개의 영이
가슴에 들어 있어 사우는 것은 괴테만이 아니요, 만물이다. 실로 만물은 그 신체의 구조에 있어서까지 이를 표시하는 듯하다. 뿌리는 향지성이
있어도 싹에는 향일성이 있고 하등동물에서 고등한 것에 갈수록 지면에서 해방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벌레는 배로 다니고 獸類는 네 발로 서고
인간에 이르러 두 다리로 선다. 인체의 구조는 물리학적으로 하면 확실히 안정치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자연한 자세를 취하면서까지 무거운
두부를 위에 두고 두 다리로 서는 것은 그의 존재의 의미를 상징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의 눈을 보라. 영원히 상공을 바라보게 위치하지 않았나….
진화란 다른 것이 아니요, 땅위에 난 생명이 땅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위의 글은 1964년 정식으로 출판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까닭에 이 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판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글로서 실질적으로는 1940년대에 쓰여진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금에 쓰여진 글이 아니고 지금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옛날에 서술된 글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최근에 서거한 굴드(Steven J. Gould)를 연상케 하는 오늘의 진화론에 대한 논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신선함을 던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12일(2005)에 있었던 ‘함석헌 선생 탄신 104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김상봉박사의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역사’’라는 글에서 “여기서 그(함석헌)는 보편적 인류역사 아니 더 나아가 자연사 속에 숨어 있는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물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김 박사는 “함석헌 철학의 첫째가는 화두는 ‘나’이다.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었다. ‘내가 아담이다. 민족이 나다. 인류가 나다. 역사도 나요, 인생도 나다. 내 속에 다 있다.’(전집 2:101). 한 마디로 존재의 온 진리는 내 속에 있다. ‘참은 하나다. 我다. 한 아다. 나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 그래 하는 말이 나다’>(전집 2:169) 라고 함석헌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단세포 생물은 생활기능도 간단하고 고등한 동물에 올라갈수록 복잡한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생리작용과 정신작용 사이에서도
정비례하는 관계가 있는 듯하다. 진화의 계단을 따라 생리작용이 복잡해지는 것은 복잡한 의식작용, 즉 더 넓고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나온 것이 의식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큰 것인 인격이란 것이다.>(전집 2:86) 여기서 필자는 무신론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저서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그도 역시
광막한 우주 안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왕국과 奈落의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오로지 사람의 결단에 달렸다는 말로 그의 불후의
명작의 대미를 장식했었다. <나는 개인 아니다. 나는 아버지 전체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란 건 거짓 것이다. 천지간엔 없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보고할 때 개인이란 것이 있지 참 삶에 개인은 없다. 내가 살려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 개인주의지 전체를 섬기려고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향기를 채우려고 나를 제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개인주의 아니다. 이 날까지 역사는 언제나 개인 아닌 개인이 바치는 자기 희생의 피에서만 수혈을 얻어 멸망을 면해왔다. 모든 참 생명적인 혁명은 따져 들어가면 다 어느 가슴에서 나왔다. 삶 자체의 가슴에서 나왔다.>(전집 2: 159-160) 그런데 철학자 김상봉은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의 원리를 염두에 둘 때에만 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주에 사람이 단
하나라는 것은 데카르트식으로 말해 어떤 경우에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오직 생각하는 나의 존재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의심할 수 없이
참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나의 존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함석헌이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서양의 근대 의식철학을 접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지만 나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이는 함석헌 철학의 형성의 역사를
분명히 서술하기 위해 반드시 밝혀져야할 문헌적 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를 길고 긴 진화과정으로 보고 앞으로도 생명의 비약에 의한 진화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소위 전통신앙을 가진다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극히 배척하여 그것은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결코 固定이 아니다. 신앙은 그렇게 비겁한 것이 아니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은 적응이요, 통제요, 지도요, 소화요, 자람이다. 신앙은 자라기 위하여 항상 새로운 싸움을 요구하고 새로운 식물을 요구한다. 어린이의 미(美)를 고집하면 말라죽음을 면치 못한다. 과학에 대하여 자기를 멀리 세우는 신앙은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과학을 거부할 것이 아니요 수용할 것이다. 소화할 것이다…. 역사는 담대한 자만이 진보의 영예를 얻음을 가르친다. 신앙은 보다 높은 곳으로 자라기 위하여 새로운 것에 대하여 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 그것, 진화론 그것이 악한 것 아니다. 우리는 이 과학의 보자기 속에 든 여러 가지 동물을 담대히 소화함으로써 보다 깊은 세계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전집 9: 22~23) 김상봉 박사의 함석헌 사상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연구를 앞으로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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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2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7 하 수상한 시절, 장자와 함께 거닐다
나이 80을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못 마음에 아쉬움이 있다면 함
선생님을 40년 넘게 사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지금도 그 인격을 그리워하건만 그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하시고
조석으로 읽고 또 읽으셨던 노자 및 장자를 철저히 내 것을 만들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한 때는 장자야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노자는
그 분량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니 아예 암송해 버리자고 몇번씩 시도했다가 실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 亦若此矣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境 斯已矣 彼其於世未數數然也 雖然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冷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秉天地之正而御六氣之辯 以游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내가 장자를 처음 접하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노자를 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여기서 이 글을 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선생님께 이 글을 배우면서 내 좌우명으로 평생 내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글귀가 <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라는 대목이었다.
온 세상이 칭찬을 해주어도 조금도 더할 것도 없고 온 세상이 비난하더라도 덜할 것도 없는 당당한 몸가짐이 나의 바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금도 가끔 이 대목을 소리내어 읽노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선생님이 직접 주신 ‘莊子翼’이라는 책자를 펴보니 1986년 11월 21일에 이
글귀를 다시 장자모임에서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나이 노릇 잘하는 이는 칼 쓰지 않고 싸움 잘하는 이는 성내지 않고 맞서는 놈에 잘 이기는 이는 다투지 않고 사람 잘 쓰는 이는 그 아래 선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속알이요 이를 일러 사람 쓰는 힘이요 이를 일러 하늘에 짝함이니 옛의 맨 꼭대기니라> (善爲士者 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爭,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 古之極) 나의 수첩 메모에 1985년 6월 6일 현충일에 <노·장자 모임 야유회 신촌역 9시 집합>이라고 적혀있다. 그야말로 선생님
모시고 10여명이 장자 말대로 소요하며 노니는 하루를 보냈던 것이다(이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소개한다). <간디라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정치하는 것 같지만(젊은이들 잘 들으시오. 그거 안할거요. 정치라는 거.) 낮에는 그 사람 하는 걸
보면, 외양으로 보면 정치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밤에는 종교신앙이라고 하는 지하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이튿날 활동할 힘을 밤마다
길러가지고 나온다>(함 선생님이 로망롤랑의 간디 전을 소개하시면서 인용하신 말씀이다)(‘씨알의 소리’ 통권 98호, 1989년 2월호
1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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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3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8 고난의 의미 이 무렵 선생님은 자주 <웬일인지 요새는 가만히 있구 싶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권도원 선생의 진맥을 받으신 것이 1987년 6월 초순경이었다고 생각된다. 진맥을 끝낸 권도원 선생은 자기 판단으로는 담도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 같으니 양방의학의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시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확실한 진단이 나오면 자기는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슴이었다.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신 것이 바로 소위 노태우 선언이 있었던 6월 29일이었다는 사실은 무언가 우리들에게 암시해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김진복 교수의 집도로 장장 네 시간에 걸친 담도 종양 수술을 받으신 것이 7월 13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선생님 생애의 마지막 일년 반에 걸친 소위 임종기를 써나가야만 할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선생님께서 1987년 3월 1일 3·1절 주일에 내가 나가는 신촌 봉원교회에서 “고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말씀하신 내가 들은 선생님의 마지막 공개강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교회의 주일예배에서 하신 말씀이니 설교가 되겠지만 나로서는 선생님의 마지막 공개강연의 제목이 <고난의 의미>라는 데 특히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만약에 함석헌 사상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난의 의미>가 되겠기 때문이다. 수많은 글이 있지만 선생님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주제가 바로 <고난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의 수첩에 적혀있는 메모에 의하면 선생님은 당일 설교에서 당신의 탄생지가 평양북도 용천군의 70호밖에 안되는 작은 농어촌에서 태어난 말하자면 평안도 쌍놈인데 옛날 삼국시대에 중국 청태조의 어머니가 강계사람으로서 진시황 때 많은 사람이 당시 조선땅에 피난왔는데 아마도 당신은 그 후손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으로 서두가 시작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지세(地勢)가 산이 많은 나라이고 따라서 평야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마음이 좁아진 백성들이고 선생님이 때로 역사 책에서 요절절(腰折節)이라고 부르셨던 신라통일도 결국은 경상도 사람 위주의 지방색이 뚜렷한 나라여서 결국 우리나라의 역사는 신라통일로 망조(亡兆)가 든 나라가 되고 말았다. 중국사람들의 고서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를 동방군자지국(東方君子之國)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신라통일 이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신의 생각에는 오늘의 세계적 암이라면 이미 오랜 인류역사에서 구축된 국가주의가 바로 장본인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3·1 운동 당시의 평양고보의 분위기는 거의 체념상태로 침체되어 있었던 당시 선생님의 구촌숙(九寸叔) 되시는 집안 어른의 아들이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이가 평양에 나타나서 함선생님의 하숙방에서 태극기를 작성하여 평양고보생의 3·1 운동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선생님은 당시를 회고하시는 어느 글에서 당시에 그야말로 몰아지경으로 그렇게 신나게 만세를 부르짖은 기억은 당신의 생애를 통해 두 번 다시 없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알기로는 1918년 크리스마스 전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에게 상해임시정부에서 밀사가 왔으며 이 소식을 들은 남강은 <내 죽을 자리 찾았다>고 매우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1907년에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의 이와 같은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3·1 운동으로 3년 징역을 살았는데 그 3년동안 옥중에서 내내 성경만 탐독했다는 것이다. 재판 당시 남강이 판사의 물음에 <하나님이 하래서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역시 남강다운 용기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남강에 대한 함선생님의 존경심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월남언론상을 수락해 주십사고 김준엽 신일철 그리고 필자 셋이서 함선생님의 병상을 찾아갔을 때, 함선생님께서 그 상을 남강 선생님에게 돌릴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신 일화에서도 역역히 나타나고 있다. 그날 봉독한 성경말씀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9절까지 즉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시고>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의 독특함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도 배워서 즉 자기가 겪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함을 비로소 얻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히브리 11장 39-40절 즉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서 선생님은 역사란 릴레이 같은 것이라는 것 즉 그 릴레이 경주에서 참여하는 모든 경주자에 의해서 비로소 그 경주는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에 자연과학에서도 논의되는 소위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파라다임과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연상할 수 있다. 즉 이미 완성된 존재의 철학이 아니라 현재도 이루어져 가고 있는 생성의 철학인 것이다. 프리고진의 <From Being to Becoming>(존재에서 생성으로)라는 저서가 과학의 세계에서도 영원한 미완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뛰어 달음박질해야만 온전을 이루는 릴레이로서의 역사가 바로 고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이란 보람에 사는 것 즉 의미에 사는 존재이며 바로 이 뜻은 하나님없이는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역사관으로 진화론도 해석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지금도 진화하는 창조로 이 순간도 온전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이란 바로 한국 사람이 사람노릇 제대로 한번 해 본 운동이라는 것이다. 남강이 일경의 취조를 받으면서 <내가 배일(排日) 운동이나 하는 놈으로 보이느냐? 하나님이 하래서 했다>라고 항변한 것은 남강이야 말로 <나도 사람이요>라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는 당시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말미에 <고난의 의미>(전집 1:312)라고 제목붙인 35장에서 한국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눈부신 아침 햇빛이 비치는 홍안령 마루턱에서 한(韓)을 내다봄으로 시작되었던 우리 역사의 여행은 이제 그 길을 다 마치었다. 그러나 떠나던 때에 보였던 그 날의 날랜 사내는 지금은 한 개 비렁뱅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물어가는 데이뉴의 길거리를 지친 발거름으로 저즘거리고 있는 장발장 같이 20세기의 문명이 만들어 놓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그는 지금도 전락의 길을 더듬고 있다…. 그 비렁뱅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다른 사람의 일인 듯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그 끔찍한 형상은 고난의 시냇물 위에 비친 우리 자신의 그림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고난의 술잔을 그것인 줄 알고 삼킬 뿐만 아니라 그 맛이 달기가 꿀 같다고 느껴야 한다…. 싣달타처럼 이 자리에서 이 고난을 극복하고야 말 결심을 하고 오라. 너와 내가 수난의 비렁뱅이니라…. 그러나 고난은 결코 정의(情意)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인도의 위대한 혼이 성스러히 말한 것 같이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다” (간디). 우리는 고난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은 삶의 한 끝이요, 병은 몸의 한 부분이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이렇게 외친 함석헌의 고난의 노래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1년 7월 <聖書朝鮮>지 제 30호 (전집 11:152) <시편 제 44장의 연구>에서 이미 <고난의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우리가 주를 인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고 우리가 잡혀 죽을 양과 같이 헤아림을 받았도다> (시편 44편 22절)를 읽고 “주를 인하여”다라고 고난의 원인을 깨닫는다. 고난의 원인은 주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전부를 들어 여호와의 군문에 항복하는 절대 항복의 믿음에서 고난의 의미를 찾은 함석헌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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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3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59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삶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 퍼져나가는 가지같이 그칠 줄 모르는 삶의 음악을/ 손에, 발에, 소리에, 얼굴에 넘쳐흐르게 하는 일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한 맘을 묶어 정성껏 바친 한 사람을 위해/ 맘껏 일하다가 힘껏 싸워 죽을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보다도/ 흘러가는 세상 물결 속에 흐르지 않는 사업을 쌓아/ 바위 위에 서서 죽는 등대지기같이 그 위에 서서 죽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또/ 영원히 실현될 길 없는 이상의 맑은 불꽃을 안고/ 새파란 날개째 부나비 되어 그 안에 뛰어들어 타죽고 만다면/ 그것은 그것은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가? 즐거움, 아름다움, 행복, 영광을 다 모르고/ 그저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그 일은/ 아, 그 일은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인가?> (전집 6: 134) 위의 시는 선생님의 유일한 시집 <水平線 너머>에 수록되어 있는 <삶․죽음>이라는 제목의 시다. 정확하게 언제 이 시를 읊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선생님이 50세 이전에 쓰신 것만은 확실하다. 어찌 보면 선생님의 사생관(死生觀)이 집약된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마침 최근에 모 일간지에 <한약재가 첨단과학을 만났을 때…>라는 제목 하에 재미 한국인 학자가 한약재에서 추출한 물질에서 항암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 미국의 암연구협회(AACR) 정기학회에서 발표하여 큰 주목을 끌었다는 기사를 읽은 바 있다. 소위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대체의학이라 할까? 소위 동양의학 특히 한국에서는 韓醫學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실에 필자는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몇몇 유망한 과학자들이 한의학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알고 있다. 만약에 필자가 평생 나의 전공분야에 충실하게 몸담고 연구를 지속하였더라면 한번 도전하고 싶었던 분야이기도 하다. 여하튼 선생님을 모시고 침으로 소위 8상의학을 개척한 권도원선생이 한번의 진맥으로 담도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양방의학의 정확한 진단을 받아오면 한 번 치료해 보겠다는 말씀에 선생님의 연세로 보아 나는 가능하면 끔찍한 개복수술 보다는 한방으로 선생님의 병환을 다스려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선생님의 주변에 장기려 박사님이 계셨고 안병무 박사가 막무가내로 한방의학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나로서도 나의 주장을 고집할 수 만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개복수술을 받으셨다. 선생님의 병상일지라 할까? 박선균님이 정리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호 (1988년 12월) 권말에 실었던 것을 여기에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일지는 최근에 박선균님이 출간한 <씨알의 소리 이야기>라는 저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1987년 6월 29일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시어 7월 13일에 담도종양제거수술을 받으시고 8월 14일에 퇴원하셨다가 8월 24일에 재입원 닷세 후인 8월 24일에 퇴원하셨다. 그러나 9월 4일에 다시 이번에는 백병원에 입원하셨다가 10월 5일 퇴원하셨다. 인촌 언론상 수상자로 수락해 주실 것을 김준엽 신일철 두 교수님과 내가 찾아 뵌 것은 이 기간 중이었다. 10월 12일에 인촌 언론상을 받으시고 1988년 새해에는 자택에서 세배를 받으셨다. 1월 6일에는 세브란스 병원 기도회에서 설교하시고 같은 날 <꿈틀거려라 씨알아>라는 말씀을 출판기념회에서 답사로 하셨다. 1월 10일에는 부산 장기려 박사님 모임에 가셨었는데 1월 21일에는 서울대 병원에 다시 입원 하셨다가 1월 29일에 퇴원하셨다. 1월 27일에는 입원 중임에도 김재준 목사님 1주기 추모예배에 참석하시어 추모의 말씀을 장장 50분 간이나 하셨다. 1월 30일에는 간디 추모 강연을 이윤구 박사와 같이 하나로 빌딩에서 가지셨고 2월 2일 부터는 선생님의 마지막 노자 모임을 다시 시작하셨다. 이 모임은 5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2월 10일에 KBS 제 3방송의 <저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유종호 교수와 대담하셨다. 2월 14일에는 부산모임에 가시고 3월 1일에는 태평교회에서 3․1절 기념강연 하시고 3월 11일에는 선생님 미수(88세 米壽) 모임에 참석하셨다가 답사를 하셨는데 그때 롱펠로우의 <인생찬가> (A Psalm of Life) 중에서 라는 절을 원문으로 암송하셨던 일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3월 13일 유영모 선생님 추모강연을 흥사단에서 하셨고 3월 14일에는 조선일보에 김동길 박사와의 대담을 발표하셨고 3월 28일에는 의정부 재야단체 주최 모임에서 강연하시고 3월 30일에는 부산 동의대학에서 강연하시고 4월 4일에는 가톨릭 여학생회관에서 <좌절 속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으며 4일 7일에는 KBS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하셨고 4월 22일 KBS 제 3방송에서 <뜻으로 본 인류역사>라는 제목으로 70분씩 4회에 걸쳐 5월 8일까지 강연하셨다. 4월 28일에 롯데 호텔에서 인간교육개발원 주최강연회에서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고 5월 10일에는 가정법률상담소 주최 모임에서 <동양사상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는데 하루 앞인 5월 9일에는 남강 기념문집의 발행사를 집필하셨다. 5월 13일에는 YMCA 사회개발부 주최 청소년 부모들에게 강연 약속을 하셨으나 당시 병세 악화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병세 호전되어 6월 13일에 퇴원하셨으나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8월 3일에 다시 입원, 8월 8일에 잠시 퇴원하셨다가 8월 12일에 다시 입원하시어 그 병상에서 임종을 맞이하시게 된다. 이제는 독자 여러분께서 내가 왜 이 글의 모두에 선생님의 <삶․죽음>이라는 시를 소개했는지 감지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저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그 일은/ 아, 그 일은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인가?>라고 읊으신 그 시가 바로 선생님께서 마지막 임종의 병상에 누우실 때까지 일년 남짓한 시간의 삶을 가르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옆에서 뵙기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선생님 스스로 당신의 몸을 그저 연소시키고 또 연소시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말로 당신이 읆으신대로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이였나! 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에 없으나 1987년 늦 가을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날 쌍문동 자택에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다. <씨알의 소리>지를 복간할 예정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이 말은 김박사에게 처음 하는 소리니 그저 그리 알고만 계시오>라고 덧붙이시는 것이 아닌가. 40년 가까이 선생님을 모시면서 이런 말씀을 듣는 일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당시에는 그 말씀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선생님 말씀대로 혼자만 알고 아무에게도 씨알의 소리지가 복간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러도 다시 씨알의 소리지 복간에 관한 말씀은 없으셨다. 그래서 나도 거의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그 다음 해 4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께서 씨알의 소리지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를 하겠으니 장소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맞은 편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연>이라는 한정식 집에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위한 모임을 4월 23일 오후 5시 반에 갖게 되었다. 그날 모임에서 새로 위촉된 편집 위원은 다음과 같다. 계훈제, 김경재, 김동길, 김용준, 김영호, 노명식, 법정, 송건호, 송기득, 안병무, 이태영, 조요한, 한승헌 (존칭생략) 이렇게 열 세분이었다. 전에 편집위원이 아니셨는데 이번에 새로 위촉된 편집위원이 김영호(인하대학 철학과 교수) 김경재(한신대 교수) 송기득(목원대 교수) 한승헌(변호사) 이렇게 네 분이었다. 이렇게 전의 편집위원보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분들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한 면면은 새로이 위촉된 편집위원 전원은 아니었다고 기억되지만 전에 편집위원이 아닌 젊은 면면이 참석하고 있던 것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그날 안병무 박사의 발언이 또한 의외였다. 이제 시대도 바뀌고 하였으니 씨알의 소리지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늙은이들은 제 2선으로 물러서는게 어떻냐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그 젊은이로 거명된 분들이 위에 새로 위촉된 네 분 이외에 몇 분이 더 있었다. 그 이름을 지금 다 기억하지는 않지만 남은 기억으로는 황석영 소설작가도 끼어 있었다. 이때 노명식 교수의 발언이 있었다. 이 잡지는 말하자면 함석헌 선생님의 개인 잡지인데 지금까지의 편집위원들이 아닌 젊은 사람들에게만 이 잡지의 편집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요지였다. 이 발언에 따라 토의한 결과 새로 구성된 것이 편집 소위원회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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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7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0
'씨알의 소리' 그 지난한 복간의 장정
열 네 분의 편집위원이 매번 모이기도 어려운 일이니 노명식 교수의 발언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지금까지의 편집위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을 위원장으로 하고 젊은 편집위원으로 구성하는 편집 소위원회에 실무를 맡기고 전체 편집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소집하기로 의견이 좁혀져 갔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편집위원 중에서 나이가 제일 젊은 분을 찾으니 김동길 박사가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내 기억으로 정확하게는 나보다 6개월 정도 아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때 김동길 박사가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형님 그저 제가 모든 것을 뒷바라지 할 것이니 소위원장은 형님이 맡아 주시구려”라고 평양도 사투리로 일종의 아양 비슷하게 넉살을 떠는 바람에 한 때 웃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함 선생님은 나와는 대각선으로 멀리 떨어져 앉아 계셨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맡아 두라는 선생님의 눈빛을 읽었다. 글쎄 나의 착각이었을까? 어떻든 이와 같은 생각지도 못한 촌극 끝에 내가 소위원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정말로 청전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높은 관직을 거쳐 지금은 사회명사로 굳게 자리잡고 있는 한승헌 前 감사원장은 당시는 변호사 자격정지로 조그마한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출판에 관한 일은 자기도 열심히 돕겠다고 거들고 나섰다. 일단 소위원장으로 선출되고 보니 아무래도 젊은 분들 중에서 함 선생님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분들은 편집위원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새로 편집위원으로 결정된 분들 중에서 김경재 한신대 교수, 김영호 인하대 교수, 그리고 한승헌 변호사님이 편집소위원회의 위원으로 수고해 주시기로 결정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결정은 결코 잘 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를 전공한 필자가 편집소위원회 위원장이 된다는 일 자체가 순서가 아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일이 김동길 박사가 소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그렇게 극구 사양한 이유다. 또 후에 안 일이지만, 편집회의에서 분명히 의사를 표시한 안 박사가 그렇다면 본인이 소위원회를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는지 모두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말이 소위원회 위원장이지 ‘씨?의 소리’지의 출판 자체에 대한 전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우선 잡지 발행에 필요한 재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병석에 누워계신 선생님께 재정 문제를 의논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모금 문제가 화제에 올랐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돈이 좀 있다'고 하시면서 인편을 통해 일천만원을 보내셨다. 그때의 형편이 선생님의 쌍문동 자택의 차고로 마련되어 있는 지하 공간을 사무실로 사용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원효로 4가 70번지의 선생님 댁도 사용할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찾다보니 회현동에 임대 사무실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마련한 사무실이 중구 회현동 2가 49-4 번지에 위치하는 7평 정도의 사무실이다. 그리고 복간호를 내니 재정이 바닥났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예금통장에 돈을 여축하면서 살아본 기억이 없는 내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그런 직책을 맡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 간다. 내가 거의 20년 전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새삼 누구를 원망코져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보고 ‘씨알의 소리’지의 복간을 귀뜸 해주신 후 반 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가 소집된 것은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풍문으로 또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하여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이제는 시대의 선구자로 높이 칭송을 받으시는-이미 고인이 되신- 기독교계의 원로시인이 함 선생님께 ‘씨알의 소리’지를 당신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고, 이미 언급했지만 안병무박사와 함 선생님 사이에서 잡지 복간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이견이 오갔다는 이야기도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함 선생님은 이런 경우에는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언과도 같은 예의 ‘기다림의 철학’으로 임하셨으리라 추측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셨던 것이 아닐까? 소위 복간호에 실린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을 선생님은 택하신 것 아닐까? 선생님께서 여러 번 말씀해 주신 맹자의 ‘告子章句’(下)에 있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늘이 장차 대임을 이들에게 내리려 하시니 반드시 먼저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들의 살과 뼈를 지치게 만들며 그들의 배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만든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분발하고 그 성질나는 것을 참게 하여 자기가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야 능히 고칠 수가 있으며 마음 속에서 번민을 하고 생각을 두루 깊게 하고 난 뒤에야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번민하는 것이 얼굴빛과 목소리에 나타날 정도까지 괴로움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으로부터 도리를 깨닫게 된다. 안으로는 법도를 잘 지키는 世家와 보필하는 현자가 없으며 밖으로는 적국과 외환이 없다면 그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 수가 있고 안락한 속에서는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여러 번 노자 모임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담론의 자리에서 수없이 풀이해주신 이 맹자의 말씀을 나는 지금 다시 한번 되뇌면서 나의 오늘을 감사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는 내 밑에서 석사학위 내지는 박사학위를 끝내고 취직해있는 제자들에게까지도 매달 십 만원씩 거출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당시에 보이게 안보이게 생각지도 않게 적지않은 금액을 때때로 보내주신 몇몇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거명은 안하겠지만 지금도 그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스며오는 고마움을 금할 수가 없다.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에서 나를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밀어주신 몇몇 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때마침 全 정권 하에서 해직되었던 기간의 보상이라 하여 고려대학교에서 뜻밖으로 지급해준 보상금은 그야말로 삼복더위의 가뭄을 해갈해주는 소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소나기’에 불과했다. 이런 와중에서 복간호(1988년 12월호 통권 96호)는 여러분들의 축복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우리들 깃발을 내려서는 안되리,/ 하나씩의 햇덩어리 가슴 깊이 품고,/ 함성하여 전진하며/ 휘날려야
하리.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통로 복판에서 사육되고 있는 토끼의 역할을 고고하게 지켜 나가신 故 박두진 시인의 ‘복간 기념시’는 그때의 고독한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평균 200페이지 전후의 그야말로 소박한 잡지지만 월간이라는 사실은 봉급이래야 형식 뿐이긴 하지만 유급직원 한 둘 가지고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도리 없이 편집소위원회에는 1월 12일 모임에서 복지 후원회의 필요성을 의논하고 ‘씨알의 소리’ 후원회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장으로 장기려 박사님을 위촉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래서 소위원회 위원이신 김경재 교수님과 같이 부산에 내려가 장기려 박사님을 직접 찾아 뵙고 재정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다음 후원회 준비위원장이 되어 주실 것을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장기려 박사님은 조금도 주저하시는 기색없이 준비위원장직을 수락하시며 그 자리에서 1천 5백만원이라는 거금을 곧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1987년 7월 13일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신 다음날 집도의가 선생님 병실을 회진할 때, 간병하던 사람들이 집도의에게
간밤에 선생님께서 통 잠을 못 주무셨다고 말하자 선생님께서 직접 “수술한 곳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잠 이루지 못했으니 걱정
마시오”라고 답변하셨다는 함 선생님의 병세는 그렇게 기다리시던 복간호를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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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교수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재 인용했습니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