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06-06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1 "싫은 사람과는 악수도 말란 말이냐" 선생님께서 1987년 6월 29일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시어 1989년 2월 4일 새벽에 돌아가실 때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에 나는 수없이 선생님의 병실을 찾았다. 물론 여러 번 퇴원도 하셨고 입원도 하셨지만 선생님의 임종기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철저하게 사람의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말의 표현이 좀 어색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즉 보통사람이 살아가는 그 삶의 길을 그대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는 것이다. 인간 함석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고나 할까? 1987년 7월 13일에 담도종양 절제수술을 장장 4시간을 받으신 직후에 선생님은 김진복 집도의가 한 말에 여러번에 걸쳐서 감격하신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이신 점을 고려하여 시술은 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한테서 꼭 수술을 하여 선생님을 치유해 달라고 수없이 걸려오는 격려 전화에 시술을 결심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당신 말씀대로 그 수없이 걸려온 씨알들의 소리에 눈시울을 붉히시는 것이었다. 나의 수첩에 적혀 있는 메모에 의하면 1987년 7월 28일 오후 1시반에 선생님을 찾아 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세계 1차 대전 때 선생님의 스승이셨던 일본인 내촌(內村鑑三)이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는 것이냐?' 라느 반문을 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렇게 큰 장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를 서러워하는 사람들 하나도 없이 그저 자기들의 정치적 책략에만 골돌하고 있는 이 몰골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만드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눈물을 글성거리시며 예수님을 말할 것도 없고 爲者敗之, 執者失之(하려하는 자는 실패하게 되고 잡으려는 자는 잃게 된다)라는 노자 제29장의 말씀을 해 주시었다. 지금도
혹자는 | |||||||||||||||||||||
|
2005-06-20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2
하나님 발길에 채이다
<나는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살갗 찢는 아픈 소리/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고요한 빛으로 오리라.>(전집 6:68)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감파리의 선생님의 산소에는 그 어떤 비석도, 묘역을 장식하는 그 어떤 장식물도 없다. 다만 묘앞에 돌단이 하나 높여 있는데 그 돌단은 보통 묘앞에 있는 제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돌 책이라고 할까 그 돌단 위에는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돌 책에는 선생님의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라는 ‘수평선 넘어’라는 선생님의 유일한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위의 시 한 聯이 새겨져 있다. <영원의 빛 다 내려다 그대들/눈동자에 쏟아넣고/사라지지 않는 향기 받아다/그대들 코에 불어넣어/그대들로 이 역사의 법괴를
메고/요단을 건너는/거룩한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임을/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것을/빌며 그 빛을/그 빛을 먹고 죽었음을/그 말없는 시체를 안는
찰나/그대들을 맡아 얻으리라>(전집 6:260) 나는 지금 선생님의 임종을 위에서 소개한 두 편의 선생님의 시를 읊음으로써 곡(哭)을 마치고자 한다. 내 서재에 걸려있는 선생님의 전신사진 앞에 매일 아침 설 때마다, 그리고 응접실에 걸려있는 선생님이 평생 즐겨 읊으시던 ‘古木千年枝二三, 天然??向東南 魂衣鳥雀長留巷 影作蛟龍半在潭 老去全身通似竹 春來一面活如藍 平生雨雪經 過盡猶 不回頭說苦甘’이라는 선생님 친필의 한시 액자를 대할 때마다 나는 전신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살갗 찢는 아픈 소리’를 들으며 ‘평생 雨雪에 몸은 지쳐 진하였어도 여전히 쓰다 달다 말하지 않는’ 선생님의 넋을 느끼곤 한다. 여기서 선생님의 장례식을 상세히 소개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씨알의 소리’ 1989년 3월호 통권 99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만 장례식에 숨어 있는 에피소드 몇 개만 적어 보겠다. 모든 장례식이 그렇지만 어떻게 영결식을 짧은 시간 안에 엄숙하게 끝마치느냐가 큰 과제다. 그래서 순서를 짜다가 문익환 목사에게 조사를 맡기면 틀림없이 긴 조사가 될 것이니 문 목사에게는 조시를 맡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막상 문 목사님의 조시는 30분이나 계속되는 장문의 조시였기 때문에 고소를 금치 못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모두가 선생님 영정을 향해 서서 기도도 드리고 조사도 읽었는데 안병무 박사는 책 몇 권을 들고 단상에 올라가 조문객을 향해 서서 조사가 아닌 일종의 강연 형식으로 책장을 여기 저기 펼쳐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일반 영결식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국무총리실에서 조사를 꼭 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의 국무총리인 강영훈 님의 요청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분위기가 현직 국무총리의 조사를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부득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의 국무총리가 일반 조문객과 같이 앉아서 장장 두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닦으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전체편집회의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89년 3월 11일 이화대학 후문 앞에 있는 한식식당 석란에서 모였다. 자연히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함 선생님의 개인 잡지인 ‘씨알의 소리’지를 계속 발행할 것이냐 아니면 중단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씨알의 소리’지는 계속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발행인 선정문제에 들어가 토론한 결과 자연스럽게 장기려 박사님을 모시기로 의견이 모아졌고 편집인에는 김용준으로 가결을 내렸다. 그리고 ‘씨?의 소리’지에 관한 모든 문제는 안병무, 김동길 그리고 김용준 삼인에게 일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함 선생님의 생신모임 이후에 이상 세 사람은 안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모였고 박선균 목사가 배석하였다. 세 사람이 숙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장기려 박사님을 발행인으로 모시기를 적극 추진하되 장 박사님이 끝내 고사하실 경우에는 김용준이가 발행인을 맡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5일에 박선균 목사가 부산에 내려가서 이와 같은 사연을 장 박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장 박사님은 당신의 건강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행인 취임을 간곡하게 사양하셨다. 그래서 도리없이 내가 1989년 5월 1일부로 ‘씨알의소리’지 제2대 발행인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함석헌이라는 한 인격을 만났다는 사실은 나의 평생을 통해서 나의 출생 다음으로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고 이미 몇번씩 이야기한 사실이지만 나에게 그 어떤 인격이 있다면 그것은 함석헌이라는 존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전공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유기화학을 빼고는 모든 것을 함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몇번씩이나 공언한 바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창간하신 ‘씨?의 소리’지 발행인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일은 너무나도 벅찬 감격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함석헌이라는 거목이 이루어 놓은 ‘씨알의 소리’지를 이어나갈 재목은 결코 아니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정은 나고야 말았다. 일단 맡고보니 앞이 캄캄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맡았다고 밖에는 당시의 심정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감상에만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4월 18일에 발족한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를 활성화시키는 일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는 ‘씨알의 소리 후원회’였던 것을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로 그 명칭을 바꿨고 ‘씨알의 소리 후원회’ 회장이셨던 장기려 박사님이 회장직을 계승하셨고 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선정을 위한 전형위원 9명이 이미 선출된 상태였다. 전형위원은 김용준, 김동길, 계훈제, 안이현, 정재현, 이문영, 노명식, 이윤구, 안병무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편집소위원장인 내가 기념사업회 일도 맡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는 발행인이 되었으니 기념사업회 일까지 맡는다는 일이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당시의 자세한 경위를 정확하게 여기서는 기록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장직을 김동길 박사에게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서 일정한 절차를 밟아 김동길 박사가 기념사업회의 실질적 책임을 맡는 운영위원장직에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기념사업회의 후원하에 ‘씨알의 소리’지는 도움을 입을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일은 묘하게 꼬여 나갔다.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직에 취임한 김동길 박사의 제일성이 의외였다. 지금까지 ‘씨알의 소리’지를 후원하기 위하여 들어온 모든 후원금은 일단 기념사업회에 입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기려 박사님이 주신 1천5백만원도 일단 기념사업회의 입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기념사업회의 주된 일이란 ‘씨알의 소리’지의 발행을 후원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미 없어져도 옛날에 없어진 옛날에 들어온 후원금까지 일단 입금시켜야 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몇푼이 아쉬운 판에 어디서 돈을 구해서 기념사업회에 입금시킨단 말인가.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부산의 장기려 박사님이 상경하신다는 소식과 더불어 나와 김동길 박사와 같이 조찬을 하시겠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롯데호텔에서 장 박사님을 모시고 셋이서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11월 24일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서 장 박사님은 내가 후원금으로 낸 돈은 ‘씨알의 소리’지 발간을 위해 사용하라고 내놓은 것이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일부러 상경하시어 김동길 박사와 나와 아침식사를 자청하시면서 당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주시는 바람에 그때까지 답답했던 나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글쎄 지금까지도 그 때의 해프닝은 수수께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
|
2005-06-20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3
"信天翁,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첫 번째 해직을 당하고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니까 1976-1977년경이 아니었을까. 받고 보니 해동화재 해상보험 주식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혀 의외의 전화였다. 사연인 즉 그 회사에 나와서 사원들을 상대로 교양강좌를 해달라는 청탁이었다.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재차 되물으면서 당시의 나의 처지를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하였더니 상대방의 반응이 더욱 의외였다. 전화를 걸고 있는 당사자가 사장이며 나의 모든 처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교양강좌를 부탁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된 날에 회사에 나갔더니 사장 임석하에 백명 정도의 사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이 직접 노트에 나의 강연 내용을 메모하는 것이 아닌가. 강사료도 당시로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생각해보니 나의 10년 가까운 해직기간 동안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의외로운 이벤트였다. 내가 심의석(沈宜錫) 사장을 처음 만나게 된 내력은 이러했다. 당시의 나의 형편이 형편이었던 만큼 때때로 심사장을 머리에 떠올리면서도 그와의 접촉은 해직기간 동안에는 다시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억도 거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은 것은 1984년에 완전 복직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의 고대 연구실에서 그를 반가이 맞았다. 복직되면서 마땅히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전화라도 한번 걸었어야 할 내가 아니었던가? 나는 미안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뒤범벅이 되면서 그를 맞이했다. 전라남도 순천 출신의 말하자면 전라도 엘리트에 속하는 분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재무부 관리였던 그는 아마 그대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였더라면 지금 쯤은 전직 정관으로서 사계의 권위를 누릴만도 한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처남이 연소하였던 관계로 빙장되시는 분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치기가 어려워 나를 초청하였을 당시에는 처가의 회사 사장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는 것이다. 처남이 충분히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는 처남에게 넘기고 자기는 지금은 <해동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자영하고 있는데, 첫 사업으로 고등학교 학생들의 대학입시용 서적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난처한 일이었다. 공과대학 교수가 나설 땅이 아니었다. 과학논술을 위한 대학입시용 녹음 테이프 제조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의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사장님은 바로 사태 파악을 한 듯 하였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청탁이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로서 무게 있는 책을 내고 싶으니 나보고 원고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연으로 나의 첫 저서라고 할 수 있는 <科學人의 歷史意識>이라는 저서가 <해동문화사>에서 나왔고 다행스럽게도 출판협회의 <오늘의 책>에 뽑혀서 귀한 상패도 받았다. 이어서 <과학은 무엇인가>라는 두 번째 저서도 <해동문화사>에서 나왔다. <씨알의 소리>지 1989년 5월호 <씨알의 소리 소식> (p.192)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지금도 때로는 옛 지기(知己)와 같이 만나고 그간 지내온 일을 서로 나누며 한 때를 즐기고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씨알의 소리>지를 맡아서 초창기에 그야말로 어찌 할 바를 몰라 우왕자왕하고 있을 때 실질적으로 <씨알의 소리>지 판매에 전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도와주신 심의석님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씨알의 소리>지 1989년 11·12월 합병호 <씨알의 소리 소식>(p.195)란에 <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 모임>의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장기려 박사님과의 조찬모임이 있기 전의 운영위원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로 기념사업회의 활동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회현동 사무실도 1989년 말에 철수하고 쌍문동 함선생님 댁 지하실을 개조하여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많은 분들의 후원금으로 <씨알의 소리>지 발행을 근근히 이끌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을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아호도리, 곧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방 후의 제 살림은 그렇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 제가 이북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는 여름 구름산 같이 떠오르는 말을 품으면서도 말해줄 어느 얼굴 하나를 못 찾아내서 발바닥을 치며 퍼득이는 것도 이 하늘 바라기와 갈매기의 관련 비슷한 무슨 미묘한 모순이 있어서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것은 또 왠일입니까? 그렇게 말은 할 것이 있는 데 바라보고 할 얼굴을 못찾아내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제 머리 속에 갑자기 어디선지 ‘남강 선생님 영 앞에’ 하는 소리가 살별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자신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 선생님의 영이 바보처럼 가엾어 퍼득이는 제 꼴을 보시다 못해 오셔서 계시해 주신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자식아, 말할 데가 없으면 왜 나한테 못하느냐?”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영입니다. 일순간에 무지한 뱃꾼놈의 갑판 같은 이 서울의 학대와 모욕을 다 잊고 태평양의 상공을 날게 됐습니다. “이제 둥지 안에 누워 자는 고운 새끼를 먹일 것 얻노라고 해가 멎도록 골몰하게 다니던 늙은 비둘기의” “훨 훨 훨 날아와서 벅벅 구르르”하는 인자한 눈동자와 음성이 들려 옵니다.> (전집 5: 349-350) 내가 20년 3개월 동안 <씨알의 소리>지를 맡아 발행하는 동안에 선생님 돌아가신 사건과 그 일주기 추도식이야 말로 가장 큰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일주기 추도식은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원 강당에서 500여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당연히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관계로 결국 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씨알의 소리>지 1990년 3월호에 자세히 당시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날의 모든 식순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겠다. 다만 가족 대표로 나온 함선생님 둘째 사위 되시는 최진삼 장로님의 인사의
말씀에서 위에 소개한 <남강 선생님 영 앞에>라는 선생님의 글의 일부가 낭독되었는데 당일의 순서 중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리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을 그대로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모습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 |||||||||||||||||||||
|
2005-08-17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4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 |||||||||||||||||||||
|
2005-09-00 교수신문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65
발행인의 편지 "기다려라 "
씨알
여러분 저는 지금 선생님의 90주년 탄생일인 3월 13일 전야에 이 붓을 들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던 때가 1949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주일날 종로 YMCA 앞을 지나다가 YMCA 건물 앞에 서있는 하얀종이에 “성서강해 함석헌”이라고 쓰여진 조그마한 게시판을 보고 그저 무심코 당시 삐거덕거리는 목조건물의 계단을 올라가 YMCA 강당 2층 뒷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선생님의 연세가 49세이셨는데 23세의 젊은 저에게는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로 보였습니다. 검은 두루마기에 수염을 기르시고 있었으니 어두컴컴한 YMCA 강당 뒤에서 뵙던 선생님은 틀림없는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셨습니다. 선생님의 성서강해를 다 듣고 나오면서 저는 혼자서 “한국에도 페스타롯찌와 같은 저런 분이 계셨구나”라고 중얼거리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 다음부터 주일날만 되면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선생님의 성서 강해의 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YMCA 강당의 뒷자리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멀리서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볼 뿐 감히 선생님께 가까이 가서 직접 찾아뵙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만 6.25가 발발하기 일주일 전의 주일날 “지금 이 화산 밑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살짝 덮여있는 봉우리 위에서는 마치 반석 위에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미쳐 날뛰고 있으니, 글쎄 언제 이 화산이 폭발할 줄도 모르고…”라고 한탄하시던 말씀은 그야말로 예언자의 외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6.25 동란은 선생님의 예언대로 일주일 후에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이 포성을 울렸고 그래서 저도 정신없이 6.25 동란의 와중에 말려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미군부대의 종군통역으로 압록강 가까이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2차 남하로 UN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면서 평안북도 개천전투에서 부대라 지리멸멸된 처참한 전쟁경험을 치른 후에 저는 고향에 있는 천안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1952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천안농업고등학교의 교장으로 계셨던 김두혁 선생님과 함선생님과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저로서는 함선생님께서 천안농업고등학교를 방문하신다는 소식은 참으로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여하튼 함선생님은 천안 농업고등학교를 방문하셨고 그래서 함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의 마음은 그저 황홀할 뿐이었습니다. 며칠 천안에 머무시는 동안 저는 정말로 행복했었습니다. 저로서는 저의 일생에 평생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 감격스러운 몇일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직접 만나뵙게 된 경위는 이러했습니다. 그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삶에 있어서 선생님은 항상 저의 스승이셨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래도 항상 저의 마음 속에 살아계셔서 저를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기회를 봐서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온 40여 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만 선생님의 90주년 탄생일을 맞이하면서 저는 지금 과거의 생활을 돌아보며 때에 다라 선생님께서 이모저모로 가르쳐주신 말씀을 회상해 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선생님을 추모하시는 분이 어디 저만이겠습니까마는 어떻든 선생님이 아끼시고 또 심혈을 기울이시던 “씨알의 소리”지를 선생님의 뒤를 이어 두 해가 넘도록 발행해온 사실은 저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러분의 뜨거운 격려와 후원으로 오늘까지 이르게 된 것을 마음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잡지 홍수시대에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저 유신시대에 “씨알의 소리”지를 끼고만 다녀도 기관원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했던 그 옛날의 “씨알의 소리”지에 대한 향수는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씨알 여러분께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간절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어찌 그러한 시절이 오래 계속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떻든 옛날의 “씨알의 소리”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잡지 홍수시대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무슨 준비가 있어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듯이 복간도 무슨 준비가 있어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발병하시기 전에 “씨알의 소리”지를 복간하실 뜻을 비치셨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게 실현단계로 옮겨지지 않은 채 선생님께서 병상에 누우시게 되었고 대수술을 받으신 후 잠시 건강을 되찾으셨을 때 다시 복간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일부에서는 어렵게 생각하시던 분들도 계셨지만 선생님께서 모이자 하셔서 1988년 4월 23일 “가연”이라는 한식집에서 모였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아무래도 창간이 아닌 복간이기 때문에 전승적인 연속성이 있어야 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져 결국 제가 편집소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게된 것입니다. 그후 선생님께서 다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고 준비된 기금 한푼도 없는 상태에서 첫 복간호가 나오기까지 무려 7-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결렸습니다. 원고 청탁이나 있으면 글이나 썼지, 잡지를 낸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마치 범꼬랑지를 잡은 격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저 잡지를 계속 내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평생을 사사하던 스승의 업을 이어서 해나간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어림도 없는 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떻게 해서든지 이 잡지는 계속해 나가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명실공히 법적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 더욱 어깨는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함석헌 선생님 기념사업회도 발족했습니다만 씨의 소리의 운영은 여전히 어려워만 갔습니다. 그래서 저의 주변에 계시는 분들에게 1년간만 매달 일정한 금액의 보조를 부탁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1년간은 매달 정액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에 힘입어 처음에 자리잡았던 회현동 사무실을 정리하고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함우용씨께서 선생님댁 차고를 개조해주셔서 그곳으로 사무실을 옮겨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익히 아시는 일이시겠지만 잡지가 세상에 선을 보인다는 일은 물론 그 내용의 편집이 절대적인 관건이긴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영업면이라 할까 운영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부터가 장사에는 문외한입니다. 따라서 영업면에서의 운영이 잘 될 수가 없었습니다. 독자관리, 정기독자를 늘리는 일, 그리고 광고모집에 이르는 여러 가지의 업무면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젊은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모 잡지사에서 잡지의 제작 및 업무면을 도와주겠다는 뜻밖의 고마운 호의를 보여왔습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씨알의 소리”를 읽고 많은 감화를 받았다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제의였습니다. 우선 잡지의 제작면에서 비용의 절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잡지의 제작과 판매영업부분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작년 10월 27일에 있었던 편집위원회에서 보고하였고 또 양해도 구했습니다. 몇 달간의 결과를 가지고 다시 의논드리겠다고 편집회의에서 말슴드렸습니다. 저 개인의 생각으로도 일단 잡지의 제작과 판매업무를 전적으로 맡기는 일이기 때문에 몇 달간의 결과를 가지고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들어 정월 초이튿날에 편집위원 몇몇분께서 잡지제작 및 판매영업부분을 일임한 그 회사와 제휴해서 씨알의 소리지를 출판하는 일은 상업주의와 결탁될 우려가 있고 또한 잡지내용의 편집에도 영향을 미칠 우려가 짙으므로 그 잡지사와의 제휴를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우편으로 보내오셨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의견서”에 서명하신 분들은 10월 27일의 편집회의에 불참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의견서”에 서명하신 분들께는 자세한 경위를 써서 오해가 없으시도록 답신을 올렸습니다. 그후로 2개월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거듭해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함선생님께서 정해 놓으신 13명의 편집위원들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함선생님의 크신 인격 아니고는 그렇게 한자리에 모일 수가 없는 참으로 개성이 뚜렷하시고 또한 각각 훌륭하신 분들이십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이제 만2년이 넘었고 선생님의 90주년 탄생일이 들어 있는 3월을 맞이하면서 몇몇분들께서 염려하신대로 앞으로 이 잡지의 운영이 과연 선생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계속되어 나갈 수 있겠느냐라는 점에서 저의 고민은 컸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선생님께서 정해 놓으신 편집위원 열세분은 아마도 씨알의 소리지의 편집위원으로 영원히 남아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 시점에서 열세분의 한결같은 합의와 후원은 어려워질 것이 예견됩니다. 그렇다고 언젠가 씨알의 소리를 복간해야겠다고 말씀하신지 몇 달이 지난 다음에 “나의 개인 잡지인데 나 혼자서 하게 되면 혼자서 해 보아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일단 복간의 시기를 늦추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되풀이 할 수 있는 저의 처지가 아님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씨알의 소리임은 분명하나 선생님 가신 후의 씨알의 소리는 씨알의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열세분의 편집위원이 엄연히 살아계신데 저 혼자서 이 잡지를 끌어 가겠다는 생각은 저로서도 꿈에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 잡지는 저의 개인잡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잡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실 때 당신께서 당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필그림 정신을 이어받고 있었던 어네스트 혹킹(William Ernest Hocking)이라는 철학자를 1962년에 방문하시고 그의 집에서 일박하신 후에 그가 “No task must be evaded, merely because it is impossible. When there is no (personal) vision, the people perish" 라고 손수 글을 써준 책을 선사 받으셨던 일을 소개하시면서 당신도 이제 나이 80이 넘었으니 누가 와서 한마디 남기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이렇게 생각하시다가 얻은 결론이 ”기다려라“라는 말씀이었다고 노자강의에서 가르쳐주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편집소위원 한분이 함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역시 이 잡지는 이와 같은 여건하에서는 밀고가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말을 하시면서 당신도 이제 더 이상 이 잡지의 소위원을 더 감당할 의미를 찾을 수 없겠다고 사의를 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맡겨주신 일인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잡지를 계속 밀고 나가는 일은 경영면에서 뿐만 아니라 기타의 운영면에서도 더 이상 감당해 나가기가 어렵고 또 자칫하다가는 선생님께 큰 욕을 돌리는 결과가 되겠다는 두려움이 앞서면서 이만 잡지를 중단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3일에 편집회의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이상과 같은 저의 심중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자리에 나오신 편집위원 여러분께서도 저의 의견에 따라주셨습니다. 씨알 여러분 저는 이상과 같은 글을 쓰기 위해 2개월 이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몹시나 착잡한 심정에 빠지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현재 법적인 발행인으로 되어있는 저로서는 제가 내릴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겸손히 기다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제 이 글을 끝내려고 합니다. 지하에 계신 선생님께서도 아마 “글쎄”하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기다리시며 선생님의 뜻을 길이 기리시기를 빌겠습니다. 지금 저는 이 글을 맺으면서 씨알의 소리를 위해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분의 얼굴을 연상해봅니다. 때를 따라 찾아뵙기도 하고 또 만나뵙게 되기를 또한 기다리겠습니다. 빚만지고 이런 글이나 올리고 있는 부족한 저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권고해 주시고 편달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탄생 90주년을 맞으시는 선생님의 영전에 이 글을 울면서 바칩니다. 김용준 드림
| |||||||||||||||||||||
|
좌담: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哲學者로 본격 조명 필요 … 行動 정신 계승해야 2005년 10월 19일 김용준 교수 외
| |||||||||||||||||||||
|
이글은 교수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재 인용했습니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