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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다 |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본래 처음의 노자에는 장(章)의 이름이 없다는 거야요. 후에
와서 1장, 2장, 하상공(河上公) 본에는 붙혔다 그러고, 본래는 후에
오다가 됐다는 거고, 있으나 없으나 뜻을 알면 되죠. 그런데 상편
하편으로 갈리는데, 상편 하편도 본(本)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다르답니다.
다 81장인 것은 같구요. 그리고 도덕경(道德經)이라고 그러지만,
서양도 도덕경이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노자의 도덕경이라
그러는데, 도덕경은 사마천(司馬遷)이 말하는데도 도덕의 뜻을 말했다
그러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도덕의 뜻이 아니고, 자못 상편은 시작이
되기를 "도(道)"자로 시작이 됐고 하편은 시작이 되기를 "덕(德)"자로
시작이 돼서 그래서 도덕경이라 그랬는게, 이 몇해 전에 중국에서 한
7,8년 됐을까 저 장사현의 마왕퇴라고 하는 데서 어떤 여자의 무덤에서
노자 고본이 나왔어. 그거는 한대(漢代)초기라고 그러니까 당대(唐代)보다도
전인데, 당대에 들어와서는 이걸 경전으로 삼아가지고 "집집마다
한책씩 둬라" 그렇게끔 명령을 하리만큼 됐으니까 많이 됐겠지만,
처음에는 그런것도 아닌데 한대의 고본이 지금 나온 것과 대동소이해.
별로 틀린거 없어. 없어진 자도 있고 오자도 더러 있고
그렇긴 하지만 대체로 같다니까 그러면 벌써 서력 기원 전부터 상당히
유행이 됐던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책의 재미있는 거는 어째 그런지 덕(德)이 먼저
있고 도(道)가 후에 있어요. 그래 그건 한다면 덕도경(德道經)이라고
그래야겠는데(웃음)그러니까 도덕경이라는게 내용으로 된거 아니고 첫글자로
인해 된거라 그뜻이 아마 옳은가보지요. 지금은 보통 도덕경이라고
그래요. 그거는 글자가 그렇게 시작이 된걸로 그렇게 아시는거
좋을꺼고, 첫장을 읽어봅시다. 그런데 이것도 보시오. 어디서 떼냐? 한문자는 없어요.
그저 단어가 있을뿐이지 동사로 새길 수도 있고 명사로 새길 수도
있고, 형용사로 새길 수도 있고 그래 한문이 어렵잖아요. 아마
그거는 산스크리트도 그렇게 돼있는지 몰라. 내가 산스크리트
잘 모릅니다마는 이집트 글자도 아마 그럴꺼야. 우리나라 몽고계
몽고말이 중가운데 연락하는, 토씨가 있어서 "나는", 하기도
하고 "내가",하기도하고 그러지만, 그저 중국말로 하면"아(我)"
하던지 "오(吾)"하던지 그럴 뿐, 거기뭐 "나는"하는,
그거는 다른 문맥으로 미루어서 생각을 해야지 그건 없어요. 그러니까
새길라면 저번에 이민위민(以民爲民)하던 모양으로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하는걸로 그건 우리말로, 중국사람은 자기가
쓰기에 따라서 그 의미가 터득되지. 그사람들은 우리 모양으로
그런뭐 토씨를 위한 강조되는거 없냐하면 그렇지는 않을꺼예요. 그런데가 문명이 났냐 못났냐 그걸 아는건데, 많이 읽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어디서 떼냐가 문제야요. 그다음에 또 可道는 길
삼을만하다. 동사로 유선생님은 "길
옳다 할진대 늘 길이 아니고"그렇게 새기셨어요. 그대로
새기면 道可道 길삼을만하면 非常道 늘 길이 아님. 떳떳한 길이
아님. 그래도 좋고, 名可名, 이름할만 하면 非常名 늘 이름이
아님. 떳떳한 이름이 아닌, 無名天地之始 이름 없음에, 유선생님도
"이름 없음에" 그랬는데 이름 없음에 天地之始 하늘 땅에 비롯,
有名萬物之母 이름 있어서 잘몬, 잘은을 우리말로 잘 그리잖아요? 百은
온, 千은 즈믄, 萬은 잘, 兆가 즐, 옛날 우리말인데 지금은 쓰지 않아
그렇지. 만물이라 그래서 잘몬, 지금 말로는 만물이라고 그러는게
좋을런지도 몰라요. 천지만물이라 그러면 만개만도 아니지요.
모든거라고 하는뜻으로 하는 말인데, 이름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 제일 주되는 것은 "무(無)"에 있다. 첫장이 이제 도(道)를 끄집어내면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길을 길삼을만 하면, 길이 있어야 가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리몸의 길이 있어야 내 갈곳을 찾아갈 수 있는
모양으로 사람의 살아가는 것도 정신적인 그 살림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걸 도(道)라고 그래요. 물론 그거는 중국사람으로서도
언제로 부터 말하기 어렵지만 본래는 길을 걸어가는 그 길에서 나왔을
것이요. 나온 말이지만 이렇게 되면 이거는 그걸 초월한 우리 정신
속의 살림에서 하는 말인데, 상(常)은 우리말로는 "늘"이라
혹은 "덧덧"이라, 그러니까 우리 지금 쓰는 말로하면 영원불변하는,
영원무한한, 지금 쓰는 문자로 하면, 공자님은 오셔서 그때 실지 형편에 가장 적당한 걸로 하느라고
해서 중(中) 보통 말을 해주면 알아듣는사람, 그러니까 일반사람 아니요?
또 사람 중에는 말을 해주기 전에 벌써 자기가 상당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또 말을 해줘도 좀체로 못알아들어서 많이 여러번 일러주고 자기가
힘을 써서야 알게 되는 사람있고, 그러니까 상근(上根)으로 났냐? 중근(中根)으로
났냐? 하근(下根)으로 났냐? 불교에서 말하면 근(根)이라고 그러잖아요.
아주 근(根)을 천지(天地)라 그러기도 하고 기근(基根)이라 그러기도하고,
타고나기를 천품을 어떻게 타고났냐? 그거는 뭐 내 임의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거 아니지요. 내가 타고나는거니깐. 그런 의미로 하면 사람은
역시, 불교에선 그래요. 나는 내 부모의 은혜, 내 마을의 은혜,
내 민족의 은혜, 나라의 은혜, 다섯가진가 네가지 은혜로 기도 하고
그러지만 사실은 거기 뭐 은혜라고하는 생각도 들어갈 여지가 없지.
누가 은혜를 주고싶어 주는 것 아니지만 내가 생각을 하면, 나는 내가
한 것 없이 이걸 받아가지고 왔으니까, 찾노라면 그런 생각이 날껀데, 노자 같은 이는 그런데 대해 불만이야. 그것만 가지고
되냐? 그건 노자의 시작이 아닐껍니다. 그 위에서부터 있지. 그건
찾아 올라가도 노자가 공자나 마찬가지로 주역(周易) 또 그 다음 올라가면
황제(黃帝), 이런 아주 간단한거지만 거기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그렇게 말해야 옳을꺼야요. 그러니까 때로해서 누가 먼저 났냐?
후에 났냐? 그것만이 아니라 후에 났으면서도 그야 본래 오던 근본적인
그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고, 또 전에 났으면서도 보통적인 일상적인
주점을 거기 둘 수도 있고, 그런거니까 같지는 않을꺼예요. 헌데
노자는 하여간 그때 나서 그때 필요로 보고하는데 유교에서 모양으로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되지 같은 도(道)라는 글자를 쓰는데 공자님의
도(道)는 깊이 깊이 뿌리라기 보다도 그런 의미도 있지요. 없지
않아요. 그거는 중용(中庸)엘 가야. 그러니까 논어(論語)에는
그런게 별로 잘 나와 있지 않지만 그후에 증자(曾子)를 거쳐서 자사(子思)로
해서 맹자(孟子)에 전했다 하고는 중용사상에 들어가면은 상당히 깊은데
있어서
도선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중용에서 말하는거 보면 천명지위성(天命知謂誠)이요
솔성지위도(率誠知謂道) 수도즉위교(隨道卽謂敎)라, 그랬는데, 그거는
상당히 논어에서 보통보는것보다는 깊이 봤다고 그럴 수가 있지만 노자는
같은 글자를 쓰면서도 그 시대가 이러니까 그저 제앞을 가릴 수 있게
현실지도를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
가지고 이 시대에, 지금 시대가 전환이 될려고 이러는데, 여기서
그런거 해가지고 되냐? 아무래도 이것은 맨처음에서부터 고쳐찾지 않으면
안된다, 노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지요. 여러분이 지금 우리 현실을 놓고 그 생각을 해 보시면 같은
문제를 보면서도 아주 현실주의로 기울어져서, 그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철학적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적으로 근본을 파고 들어가는 데
갈 수 있고, 그럴겁니다. 이행도(易行道)와 난행도(難行道) 생각을 깊이하기 시작을 하면 도대체 사람이라는거 뭐냐?
사람은 어느 사람도 사람이라 생각이지만 사람은, 내 또 사람의 뿌리는
어디냐? 요새말로 뿌리를 찾을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요새 하는 말을 보면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면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됐다" 순전히 물리적인 주로 요새말하는, 복잡한 단백질이 화합이라든지,
효소의 화합이라는지, 이런걸로 설명을 해서 무엇이 누가 목적이 있어
그런 것보다, 가다가 어떻게 그렇게 됐어. by chance라 자주 그러는데,
과학자들은 그렇게 안심이 되는지 몰라 하지만 사람은 또 그렇게 돼요?
대세가 이러면 남들이 하는대로 거기 대해 어려운거니까 그저 남하는대로
좋게 따라가자, 쉽게 그런 점도 있지만, 그건 안일주의지. 그래서
옛날도 이행도(易行道), 난행도(難行道)보다는 이행도, 쉬운 길을 따라가. 날보고 주님, 주님 했지만 정작 문턱에 오면 문이 닫혀있어.
안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러잖았어요. 그런
단호한 말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그거는 그렇게 말을 해줘야
알기 때문에 그랬는데, 지금 이시대가 이렇게 되면 사람이 다 어드런고하니
이걸 생각을 해서 "방향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길이
옳습니까?" 그건 다 찾을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 쉽지 않으니까
어디라도 가서 당수한테라도 돈이라도 주고해서 당수(黨首)라고 그러고
그런데 가 붙으면 어떻게 어떻게 쉽게 지내가면 그게 쉽지않으냐? 하지만
그런 사람 민주주의 못하고 만단 말이야. 민주주의를 땅 위에서
정치하는데 민주주의를 못한다 그런다면 하늘나라 못들어 갈꺼요. 하늘나라가
민주주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구경 마지막에는 내가 주검을 가지고라도
뚫고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는데, 그 생각 아니해. 그러노라니
얼마나 하면 여기서 노자가 무(無)하고 그랬겠어. "없다"
"무다" 그러니까 대개 사람은 "아이구 그걸 누가 해요"했는데
그렇지만 중국역사에 있어서 노(老).장(莊)의 사상 아니고 오늘날 까지
올 수 있겠나? 안그렇다는 말이야. 이제는 함곡관(函谷關)도 없다 오늘 저녁은 그 얘기하다가 시간도 다가고 하니까 말겠습니다만
해도, 날더러 말을 하라면 하나는 의미의 세계이고, 종교라, 어느 구체적인
종교를 말을 하면 그건 또 전도가 되니까. 종교로서야 전도하는거
옳은 일이지 나쁜 일이겠소. 그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그건
또 남의 종교의 침범이 되니까. 남 믿는 종교가 번민이 돼서 "난
죽을지 살지 모르겠소"하면 모르지만, 남 뻔히 믿는 종교있다는데
가서 "네 종교는 버리고 내종교를 따라와야 된다" 그런말
할 것 없어요. 왜 남의 믿는 걸 방해를 해요? 그러니까 전도가
좋기도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되면 도리어 남에게 나쁘게도 될 수 있잖아요?
그 설명하자는 건 아닙니다마는 하여간, 차원이 다른데 현실문제는 현실문제고
사람은 두 차원에 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건 왜 그러냐?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탄식이 나오지 않아요. 그렇게 어려운 무엇을 겪은 바울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그러는거는 이 현실을 이 시간에 사람으로써 하니까
자주 이런 말이, 이건 노자하고는 직접으로 관련이 없는 말이 자주 나오는군요
해도, 우리는 지금 방향을 결정을 못해 이러는데, 방향 결정해야 하느데,
방향은 물론 현실 문제지, 현실에서 어느길로 가는 것이 옳겠냐? 그 방향이겠지만
그러나 뿌리의 그 세계, 의미의 세계에 관련 안되고 현실이란게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그걸 혼합을 할 수는 없지요. 노자는 그때 당시에
사는 사람이면서도 자기도 남들 하는 모양으로 먹고 사는 직업도 해야
된다고 도서관에서 서고 지키는 일 하지 않았어요. 별 아무 것도
아닌 하급관리니까 누가 이름이나 알았겠어요. 허지만 생각은
깊이했던 사람이고, 그리고 있다가 함곡관(函谷關)을", 거기 관이라
그랬지만 이 관인지 저관인지 대개 중국사람이 그때 관을 넘어서 간다하면
함곡관인데, 함곡관을 넘으면 저쪽으로 가서 산골이야요. 아주
문화세계와는 딴 곳인데, 그리로 갈라고해서 가는데, 또 어떻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가 "선생님이 거기 가시면 다시 오실 수 없는데 우리를
위해서 무슨 말씀을 해주시고 가셔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2년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써준게, 전설로 돼서 몰라요. 도덕경이라는 5천문이다,
그런다는데 꼭 요거이겠소? 들고 나고가 있고 없어진 것도 있고 다른
데서 들어온 것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그게 이제 노자의 글인데. 그런 가운데서 공자 같은 이는 고심많이 한 이지. 그거
어느 그렇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도 깊은 성현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는
성현이란 말 몸소 하지는 않았지만, 한마디로 민(民)이라하는 걸 가르치면서
그래도 어떡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를 가르쳐주겠나? 그래서 노자보기에는
그런 것이 말은 옳긴 옳은 말인데 그것은 조금 잘못하다가는 아주 형식적에서
걸려버려 가지고 도리어 잘못이 될 우려가 많이 있어. 그러니까
아마 어떤 때는, 노자는 그리 말 않했소만은 그다음에 장자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과학에선 아주 그건 안그래. 그저 현실
문제만을 들여다
보고 하니까 잔혹하다면 잔혹한 현실 문제만을 얘기하니까.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런거 없으니까 "뭐 죽든지 살든지 뭐 하다가 죽더라도
싸워라도 봐야 옳지 않느냐?" 그런 이론이 나올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사람이 또 그걸 현실에만 그러냐? "죽으면 다냐? 그러면 또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시대가 달라서 외양으로 많이 달라졌어도 노자가
그때 당하고 공자님이 그때 당한 것대로, 뿌리도 안캘 수도 없고 현실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런 중에서 어떤 걸로 살아가느냐? 노자는 그땐니만큼
그러다 그러다 할만큼 말하다가 "나는 이제 간다" 그리고
또 들어가면 됐지. 그럴 수가 있는 시대야. 허나 우리는
이제 그런 함곡관이 없지. 거길 넘어가면 이쪽 세상으로 들어오지
못할 그럴 때가 있다면 혹 그래도 좋을는지 몰라요. 하나 지금
그럴 데가 없지 도피를 어디로? 도피를 할 수가 있소? 만일 처지를 바꿔서 요새 노자가 와있다 그런다면 함곡관 넘어서 어디로 갈려고 그래도 갈데가 있나? 어디로 간단 말이요. 중국을 간다면 아직도 산골이 있는지 모르지만 손바닥만한 우리나라에서는 들어갈 산골도 이제는 없어졌어. 산골이 있다면 가서 해도 괜찮아요. 왜? 그게 현실주의자들 한테 너는 도피를 하냐? 너는 아주 무책임하지 않냐? 그럴는지 모르지만, "너는 그럼 책임있게 해봐. 얼마나 하나?" 야당이랍씨고 나가서 그럼 네가 책임대로 하는거야? 현실에서 타협을 어느정도 해가지고라도 그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아요? 말은 좋지만 들어가서 호랑이 잡아온 놈 있더냐?(웃음)들어가야 잡잖아요. 그러지만 들어가면 먹혔지(폭소) 호랑이는 어떻게 됩니까? 호랑이는 그 다음에 다른 호랑이가 또 잡아먹을꺼요. 그렇게 끝나는거지(웃음). 말로 할 수 없는 까만하늘(玄天) 그런데서 어떡하면 이 고전을 지금에 살려서 볼 수가 있을까.
이걸 놓고 이렇게 생각을 할 때, 무(無) 무섭긴 참 무서운 무(無)자인데,
참 무자는 옛날은"仟"요렇게 쓴건데, 이건 근원을 알 수가
없어요. 지금은 "無"이렇게 쓰는대, 진시왕 때에 와서
많이 간섭을 해서 고쳐 쓰고 그러고 했어요. 학자라는건 없고
옛날 글 베낀다는 사람이 있어서 글씨 쓰고 이렇게 하니까 거기 많이
달라지고 그래서 그때부터 "無"자로 왔는데, 고자로는 "무"이렇게
무자를 썼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율배반적으로 사고하기를 상대적으로
사람인 다음에는 예수도 별 수 없어, 석가도 별 수 없고, 상대적으로
생각을 하게 됐는데, 상대적으로 생각을 해야지만 모르니까 어떡하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걸 초월하냐? 그러는 데서 無자도 해봤다가,
맘이란 없다. 그래 봤다가, 그러니까 그말에 여러분이 취하질
말고 그 자리가 뭐냐? 어째서 그 소리가 나왔겠냐? 그 심정을 더듬어
보는거요. 허면 그거는 일조일석에 되는 거 아니고, 외람한 말이지만
나도 확실히 그 자리에까지 가 잘못하고 하는 말이지만, 어렴풋이 짐작되는
걸 보면, 그러노라면 어느 그 자리가 뭔지 그.. 그렇게 有欲 無欲으로 갈라 얘기하고는 그것만으로는 안되니까
比兩者는 出異名이라. 이 둘이 사실은 하나야. 하나는 나왔는데
이름이 다른거야. 하나는 절대(絶對)고 하나는상대(相對), 요새말로
하면 절대. 상대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同謂之玄이라 근본을
찾아
올라가면 까만거. 이것도 까망 저것도 까망,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니까 까맣다고 玄이라 그랬어. 현(玄)은 하늘, 푸른 하늘이라고
그러다고 그러다가 높다가 높다가 묘해서 마지막엔 까만 하늘, 현천(玄天)이라
그랬어. 여기 노자는 현(玄)자를 좋아서 (德)도 현덕(玄德)이라,
보이는 덕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그거는 생각을 얼마나
깊이했냐? 그걸 표시하는 거야요. 玄字를 좋아서 쓰는거.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